꽃의 빛깔, 향기, 모습에 황홀하다. 아울러 생명의 신비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다. 이 원초적인 느낌이야말로 우리의 태어남의 의미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꽃 한 송이에서 우주를 본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것이 내가, 우리들 사랑이 우주에 닿아야만 완성된다고 믿는 까닭이다.
꽃은 우리를 뇌쇄시키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눈물겨운 몸짓이다. 그 몸짓에서 삶을 얻고 위안을 얻는 우리는 꽃을 최상에 두고 경배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함으로써 식물에 진 빚을 티끌만치라도 갚을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다.
‘꽃’에서 ‘시간이 흘린 눈물’까지는 먼 길이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이 내 삶의 섬, 혹은 다리 역할을 해서 나는 깊은 심연을 건너왔다는 생각이다. 삶을 찾아 떠난 이 순례여행에서 나는 많은 허무와 무의미를 만난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어딘가 꽃은 피어 있다. 꽃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삶의 원초적 물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인 것이다.
<꽃> 책 이후로 나는 여전히 꽃을 대상으로 삼는다. 지게에 가득 짊어진 나뭇단에 꽃을 꽂고 가는 젊은이라고 해도 좋다. 아니면 옛날이야기에서처럼 꽃을 꺾어달라는 여인을 위해 바위 옆에 소를 놓아두고 벼랑을 오르는 늙은이라고 해도 좋다. 꽃은 단순히 꽃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절정을 향하여 쉬지 않고 올라왔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다가 절정이란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룩하고 있는 그것, 그곳임을 알고 놀란다. 놀라지 않기로 한다. 다만 자기의 안을 향하여 놀라움을 이룩해야 하는 이 인생이라는 것! 그것이 글쓰며 이룩하는 보람과 행복임을 안다는 것!
늘 고독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자처럼 산다고 해왔다. 파행과 만행이란 고독의 벽쌓기였다는 말도 실상 부질없다. 오로지 나는 글씀으로써 나를 지키며 살아왔고, 살아가겠다는 말만이 필요하다. 그 길에 꽃들은 피고 지고 나를 지켜주었다. 그것으로써 이미 신비와 신화였다. 어떤 삶일지라도 거기에 신비와 신화의 세계가 있다.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름다워서 심원하다. 그래서 삶과 글과 꽃은 같은 선상에 있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꽃피었는지, 또 꽃필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식물의 생명이 물을 요구하듯이 우리에게는 눈물이 요구된다. 흘린 눈물의 양이 사람을 승화시킨다. 그 눈물을 받은 양재기를 부어 설산(雪山)의 크레바스에 내 나무를 키운다. 고독과 고행이 자기 안에서 자라나 동충하초처럼 되려는 꿈속의 나를 본다. 언어도단, 어불성설. 그러나 나는 살아온 나날을 그렇게 바라본다.
지난 시간이 흘린 많은 눈물을 잊어서는 안 된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그 눈물이 말라가며 남긴 얼룩이 내 삶의 무늬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꽃과 눈물 사이 이 책을 바치며, 나를 글의 제단(祭壇) 위에 놓으려 한다.
이 소설은 전쟁 그 자체나 사랑 그 자체를 말하려는 목적으로 씌어진 것은 아니다. 내 머리를 사로잡고 있었떤 뜻은 일종의 형이상학 쓰기였다. 전쟁과 사랑의 '아우라'를 보고자 한 욕심이었다. 소설을 다 쓰고도, 역시 사랑의 완성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묻는다. 삶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다. 아득할 뿐이다.
<삼국유사>를 읽으려 해도 왠지 난삽하게 다가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한편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속담이 기억났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즉, <삼국유사>의 기록들은 하나하나 빛나는 구슬로 이루어져 있는데, 꿰어 있지는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런 벗님들과 <삼국유사>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읽은 이야기들을 꿰어 엮어서 그들에게 선물로 드리고 싶었다.
거제도에 체류하는 동안 발견한 작은 섬 지심도는 잊을 수 없는 섬이다. 그리하여 오늘까지 그것은 나에게 사랑의 발견과 확인과 재생의 뜻을 일깨워준다. 항상 초심을 잃지 않는 마음가짐을 아로새겨주는 사랑이다.
이 책과 함께 오직 자기만의 사랑을 깨우쳐 얻는 사람이 있게 되기를 비는 마음, 하늘의 닻줄이며 바다의 돛줄인 수평선에 바라는 마음이다. 섬의 기돗소리가 수평선을 그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