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이화여대 오수근 교수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예고도 없이 불쑥 연구실을 찾아 왔다. 미국 미시간 법대로 안식년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내가 보면 틀림없이 좋아할 책자를 하나 발견해 복사를 떠 왔다며 내밀었다. 그 제목이 “놀랍게도” - 실제로 정말 놀랐었다 - <미시간 대학 국제법 시험 100년(100 Years of International Law Exams, University of Michigan)>이었다. 책자 앞에는 전설적인 대가(大家) William Bishop, Jr.(미시간대 1948-77년 재직) 등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었고, 가장 오래된 문제는 이름도 처음 듣는 Kirchner 교수란 분이 1896년 6월 출제한 내용이었다. 이를 보는 순간 가슴 속 깊이 가벼운 흥분과 전율을 느꼈다. 와아, 19세기의 문제를 목격할 수 있다니! 작은 책자지만 대학의 역사가 정리되고 축적되는 모습을 당당히 과시하고 있었다. 명문대학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대학의 학문적 전통이 쌓이는 것 아니겠는가? 반면 우리 대학은 언제 이런 비슷한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가슴 한편을 무거운 돌이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이후 미시간대 국제법 문제집은 마음 깊은 구석에 동면하듯 자리 잡았다. 이 책의 출발점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한 책자를 필자를 위해 일부러 구해다 준 오수근 교수(상사법)에게 감사한다.
미국의 법대들은 - 아마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대학은 전부 - 모든 교수의 모든 시험문제를 도서관에 비치해 공개한다. 학생 입장에서 기출문제에 대한 궁금증은 동서고금이 다를 리 없다. 우리 역시 대다수 학생들이 갖은 방법으로 담당교수의 기출문제를 입수하려 한다. 아마 누구는 비교적 손쉽게, 누구는 좀 더 어렵게 구하리라. 그 과정에서 인맥과 개인적 요령도 작용할 것이다. 요새는 학생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공간에 적지 않은 기출문제가 게시되어 있다고 들었다. 과목에 따라 기출문제 획득이 어려운 경우도 물론 있으리라 생각한다. 수강생 일부는 기출문제를 학기 초부터 알았고, 일부는 끝까지 몰랐다면 예기치 않은 불공평이 발생할 수 있다. 시험문제가 무슨 기밀사항도 아니고 결국 다수의 학생이 이를 입수한다면, 학생편의 제공 차원에서 우리도 학교 당국이 매학기 기출문제를 수집해 공개함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일반 학과목 시험문제뿐 아니라, 석박사 과정 입학시험이나 학위논문제출 자격시험도 공개함이 좋다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교수 생활을 하면서 같은 국제법 전공 선후배 교수들이 어떻게 출제하는지를 직접 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문제가 일반에 공개되면 출제자들은 더 한층 신중할 수밖에 없고, 동료 교수들끼리도 참고가 된다. 출제에 관한 기관 전체의 노하우가 쌓이게 되며, 이를 통해 학교의 역사와 학문적 전통도 축적된다.
필자는 서울대 부임 수년 후부터 서울법대도 매학기 시험문제를 수집해 공개하자고 행정 담당자에게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누구도 이에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유학시절 자신 또한 그런 편의를 보았을 분들도 기출문제 수집·공개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이상하기조차 했다. 오히려 여러 가지 부작용이 예상된다며 학생들끼리 알아서 구하도록 방임하는 편이 좋다는 분도 있었다.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솔직히 답답했다.
개인적으로 매학기 강의를 마치면 시험 문제지를 파일철에 묶어 정리하고, 컴퓨터 파일로도 보관해 왔다. 가장 큰 목적은 한 두 해 전과 사실상 동일한 문제를 다시 출제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단 필자라도 매 학기 강의 초반 지난 몇 년 간의 그 과목 기출문제와 채점 소감을 수강생들에게 제공하기로 했다. 이번 학기에 반드시 동일한 스타일의 문제가 출제된다고는 미리 장담할 수 없어도, 같은 교수가 같은 과목의 출제를 하는데 갑자기 엄청난 변화가 있기야 하겠냐는 설명과 함께.
채점소감에 대해 잠시 소개한다. 필자는 2004년 1학기부터 정년 퇴임 시까지 서울대학교에서 필기시험을 본 모든 과목에 대해 성적평가 후 채점소감을 홈페이지 수업게시판에 공시했다. 시작은 더 이전부터 했다. 보관된 가장 오랜 기록은 1999년 1학기 채점소감이다. 학교 홈페이지가 제대로 정착되기 전에는 간단한 소감을 학교 게시판에 방문(榜文)으로 붙여보기도 했다. 하여간 2003년도까지는 일정치 않았던 듯싶고, 보관도 되어 있지 않다.
채점소감을 공시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학생 입장에서는 자신이 받은 기말성적의 근거가 궁금하겠지만 과거 서울법대의 경우 국제법 수강생이 150명 내외나 되 일일이 개인적 강평을 해주기 어려웠다. 아마 소수의 용감한 학생만이 교수에게 직접 연락해 자신의 성적에 대한 이의나 문의를 했을 것이다. 필자가 이의제기 학생을 만나 답안지를 다시 검토한 후 평가상 실수를 인정하고 성적을 고쳐준 경우는 평생 딱 한번 있었다. 답안지를 찾아 문제점을 지적해 주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설명의 반도 마치기 전 자신의 성적에 승복하고 말문을 돌렸다. 즉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고 온 것이다. 그래도 학생을 만나 답안지를 보여 주며 성적평가의 이유를 설명하려면 최소 30분은 걸리고, 1시간도 금방 지난다. 성적에 민감해 하는 분위기가 형성됨에 따라 찾아오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갔다. 자기 성적에 궁금해 하는 학생을 탓할 수야 없지만, 이의 제기 면담은 피차 괴로운 일이었다. 시간적으로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수강생에 대한 최소한의 서비스로 채점소감을 학교 홈페이지에 공시하기로 했다. 답안작성의 방향, 중요 논점, 평가시 기준으로 삼은 사항, 많은 학생들이 범한 실수, 좋은 답안을 작성하기 위한 일반적 조언 등을 그야말로 두서없이 나열했다. 체계적인 강평은 못되고, 모범답안의 제시는 더욱 아니었다. 그래도 학생 입장에서는 자기 점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결과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이후부터 성적 이의 방문자가 거의 사라졌다. 채점소감을 작성하는 일이 부담은 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몇 배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채점소감은 차년도 수강생에게 기출문제와 함께 제시해 참고하도록 했다. 특히 처음 법학과목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지침이 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오랫동안 이를 계속하니 그 내용도 상당한 분량이 되었다.
2019학년도를 마지막으로 서울대학교에서의 24년 6개월의 교수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나름 교수로서 정리할 수 있는 부분은 이번 기회에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가슴 속 한 귀퉁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미시간 대학 국제법 시험 100년>이 다시 떠올랐다. 나 혼자라도 비슷한 작업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책상 뒤 서가에서 25년 동안 모아온 시험문제철을 꺼내 처음부터 살펴보았다. 하나의 파일철 속에 묶인 시험문제지는 A4 용지 수백장이 되었다. 문제 자체보다 채점소감의 분량이 더 많아 다 합하면 족히 책 한권은 될 듯 했다. 종이 문제지의 내용이 모두 컴퓨터 파일로 보관되어 있는가를 점검하니 예상 외로 1/8 정도의 분량은 컴퓨터 파일이 없었다. 주로 석박사 과정 입시나 자격시험, 과제물 문제 파일들이 보관되고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중간·기말 시험문제보다는 관리에 소홀했던 듯싶다. 그래도 종이 문제지가 남아 있는 경우 다시 컴퓨터 파일을 만들 수 있었다. 중간 및 기말 시험문제는 모두 확보되어 있으나, 입시문제나 과제물의 경우 일부 완전 분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막상 서울대 교수생활 25년 간의 시험문제를 한 권의 책으로 엮으려 하니 몇 가지 걱정이 떠올랐다. 이를 책자로 다시 내는 작업이 과연 의의가 있는 일인가? 혹시 개인적 호사에 불과하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시험문제 내용에 미숙한 점도 있고, 채점소감에 부끄러운 부분조차 있는데 이를 공개해 스스로 창피를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을까? 내 실력의 밑천이 너무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흉이나 잡히지 않을까? 책을 내면 독자가 얼마나 있을까? 이런 저런 고민이 없지 않았으나 이 모두 필자 개인이나 학교가 거쳐 온 역사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활자화하기로 결심했다. 마치 회고록이란 부끄러움의 기록이듯 말이다. 맡아줄 출판사가 없다면 자비 출판이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주변 몇몇 사람에게 이런 책자를 계획한다는 말을 해 반응을 떠 보았다. 모두들 처음 듣는 종류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니, 자신의 시험문제를 모아 책을 만든다고? 첫 표정은 좀 어리둥절해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책의 출간을 맡아준 박영사 담당자의 첫 반응 역시 비슷했다. 그 때마다 <미시간 대학 국제법 시험 100년> 이야기를 하며, 이 책의 구상은 거기서 시작되었다고 하면 태도가 좀 달라졌다. 해 볼만 한 시도라며 적극적인 격려로 바뀌기도 했다. 다행히 박영사와 출간에 합의할 수 있어서 자비출판은 면하게 되었다. 그래도 제작이 진행되어 교정을 볼 때까지 이게 과연 잘하는 일인가에 관해 알 듯 모를 듯한 불안감이 치솟기도 했다. 하여간 출간의 성사를 위해 노력해 준 박영사 조성호 이사에게 감사한다.
시험문제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매학기 실시한 중간 및 기말시험. 이에는 종종 과제물 문제가 포함되며, 중간시험은 보지 않은 학기도 적지 않았다. 둘째, 석박사 과정 입학시험. 셋째, 석박사 과정 논문제출 자격시험. 채점소감은 물론 중간·기말 시험에 대해서만 첨부되어 있다. 과제물의 경우 다양한 형태의 과제를 부여한 바 있는데, 그 중 사례풀이형 문제가 아닌 경우 본 책자의 성격에 맞지 않아 생략했다. 대학원 석박사 입시와 논문제출 자격시험은 필자가 매년 출제를 담당하지 않았기에 빠진 연도가 많다. 여러 해 강의와 출제를 하다 보니 문제들 중 유사한 경우가 없지 않고, 기말시험 문제를 약간 변형해 수년 후 과제물 문제로 활용하기도 했다. 다소 중복적인 이런 내용 역시 빠짐없이 수록했다. 채점소감은 처음 제시된 내용을 그대로 전재함을 원칙으로 했으나, 당초 거칠게 작성된 표현이 적지 않아 독자의 편의를 위해 약간의 윤문을 한 부분도 있다. 책 구성에서 학사과정 시험을 2004년과 2010년을 기준으로 나눈 이유는 2004년부터 모든 시험에 채점소감을 첨부했다는 개인적인 이유와 2010년부터는 법학전문대학원 국제법 강의가 시작되었다는 제도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이한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편집과정에 박영사 김선민 이사의 노력이 돋보였다.
필기시험은 누구에게나 괴롭다. 인생 진로에 큰 영향을 주는 입시는 물론이고, 학생시절 매 학기 치루는 학과목 시험 역시 늘 몸과 마음을 힘들게 만든다. 아무리 많이 준비를 해도 시험에 임하는 마음은 늘 불안하다. 필자 역시 30대 중반 박사과정 논문제출 자격시험을 마치니, 이제 내 인생에서 당락이 결정되는 중요시험은 더 이상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적 해방감을 느꼈었다. 시험문제철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에게 괴로움을 준 기록 모음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시험을 피해 살 수 없다. 누가 그랬던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미시간 대학 국제법 시험 100년> 책자 서문의 맨 마지막 구절과 동일한 단어로 이 글을 마친다.
“Enjoy...”
2020. 1. 30.
매년 가을이 지날 무렵 필자의 가장 큰 고민은 다음 해에도 「신국제법강의」 개정판을 발간할지 여부이다. 개정판을 준비하는 일은 필자로서도 고된 작업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바쁜 연말연시 몇 달을 개정판 원고 정리와 교정에 매달려야 되기 때문에 늘 시간 부족에 시달렸다. 필자는 정년을 이미 했지만 2024년 역시 분주하게 보냈다. 상반기에는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대한민국 수립과 국제법」을 박영사 간행으로 출간했다. 여름부터 연말까지는 K-Mooc의 일환으로 “국제법 길라잡이” 영상강의를 제작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여했다. 이 강의는 일반인도 알기 쉽게 국제법의 기본을 소개하는 작업으로 http://www.kmooc.kr을 통해 누구나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15주차 강의로 진행되며, 2025년 초반 공개가 예정되어 있다.
개인 사정이 그러다 보니 개정판 작업을 위한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지난 연초부터 틈틈이 준비한 개정 원고를 모으니까 사실 이번에는 개정 수요가 다른 해보다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2025년 초 개정판을 내야만 하는 특별한 사정이 발생했다. 외교부가 지난 여름 「UN 헌장」과 「ICJ 규정」 번역을 새로 고쳐 관보 고시를 했기 때문이다. 원 조약 내용의 변경은 없었으나, 어색하거나 애매했던 기존 번역본 상 문구가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 거의 전 조문의 표현이 조금씩이라도 바뀌었다. 국제법 연구와 학습에 가장 기본인 조약의 번역이 변경되었으니, 「신국제법강의」에도 이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UN 헌장」과 「ICJ 규정」은 국제기구나 분쟁의 사법적 해결 항목뿐 아니라, 이 책 거의 전체에서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관련 표현을 전반적으로 찾아 수정해야 했다. 불가피한 개정 필요가 있는 만큼 더불어 몇몇 최신 국내외 판례도 반영하고, 내용도 여러 부분 손보았다. 다행히 전체 면수를 늘리지 않는 범위에서 개정판을 만들 수 있었다.
이번 개정으로 「신국제법강의」가 제15판을 맞게 되었다. 초판 발간 이래 지난 15년간 이 책으로 강의를 하면서 필자가 학생들로부터 가장 자주 받은 요구는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 “검토”라는 항목에 질문만 있는 경우 정답을 잘 모르겠으니 답도 함께 설명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둘째, 수록된 영어 판결문을 다 읽기 부담스러우니 그중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쳐달라는 요청이었다.
사실 검토 항목 중에는 법 자체가 불분명해 국제법 전문가도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제기가 종종 있다. 질문은 던졌지만 필자조차 답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이런 문제를 제시한 이유는 학생들이 항상 남이 준 정답만 외우지 말고 스스로 생각을 해 보기를 권하기 위해서다. 외국으로 유학간 한국 학생들은 교수가 제시한 설명을 잘 외우기는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나 창의력이 떨어지며 변형된 상황에 대한 지적 적응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는 보도를 종종 접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 역시 그런 지적에 공감한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는 한국 교육이 초중등 교육과정에서부터 정답을 암기하는 데 치중하고, 평가도 객관식 위주로 진행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실 검토에서 어려운 질문은 개론 수준의 국제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는 답을 몰라도 상관없는 내용이 적지 않다. 당장은 무시하고 지나쳐도 지장이 없다. 다만 국제법에 좀 더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스스로 생각해 보고, 동료들과 토론하고, 관련 전문서적을 찾아보며 자신의 답을 추구해 보기 바란다. 외국의 정평있는 국제법 교과서를 보면 국제법 학자들 역시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수북이 제시되어 있다.
이 책에 부담스럽지만 영어 판결문을 수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국제법의 많은 원칙과 내용은 기왕의 판례에서 기원했거나 판례와의 관련 속에서 발전된 결과물이다. 판례는 교과서 내용 상당 부분의 원천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법의 원리‧원칙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구현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판례연구를 통한 학습이 효과적이다. 법원칙이 실제 현실에서 적용된 모습을 직접 보면 그 내용에 대한 이해를 한층 높일 수 있고, 미래의 유사 사건에 대한 대응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판례 요지 습득만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판례 원문 읽기가 중요한 이유이다. 부담스럽더라도 피할 수 없는 작업이다.
사실 영어 판결문은 원어민 역시 독해가 쉽지 않다. 한국 학생들이 읽기 힘드니 밑줄 쳐달라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장편 명작소설의 중요한 부분만 발췌·요약된 다이제스트판을 보고는 원작의 감동과 느낌을 얻을 수 없듯이 판결문 역시 몇 줄의 요지만으로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밑줄 친 몇 줄만 읽을 요량이면 앞의 우리 말 소개문 읽기와 별 차이가 없을 듯하다. 남이 해준 몇 줄의 요지만으로는 잘해야 객관식 문제를 해결할 잡지식 정도나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법리의 기초를 튼튼히 하려면 항상 원전을 보며 그 논리 전개와 표현을 직접 경험해야 한다. 그 방법이 당장은 어렵고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장기적으로 실력향상의 정도요 지름길이다. 이런 훈련이 두뇌의 기초체력을 기르는 수단이다. 이 책에 수록된 영어 판결문은 외국의 정평있는 교과서와 비교하면 몇 분의 일 수준으로 짧게 발췌된 분량에 불과하다. 그런 정평있는 교과서와 비교하면 이 책의 수록 내용은 밑줄 친 핵심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무대에서 미래의 외국 경쟁상대들은 이 정도 이상을 학습하고 나온다. 더구나 그들 상당수는 영어 원어민이다. 당장은 힘들어도 우리 또한 좀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필자가 이 책을 내면서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 사항 중 하나는 한국 실행에 대한 소개였다. 초판 서문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국제적으로 정평있는 외국 개론서나 이미 국내에서 발간된 여러 교과서 외에 이 책이 별도로 존재할 의의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 중 하나는 필자 나름 한국의 사례와 경험을 담으려 노력했다는 점을 내세우고 싶다. 대한민국 현대사 속에서 우리가 경험한 국제법 실행은 한국인 스스로가 아니면 누구도 정리할 수 없다. 필자는 교수 초년 시절부터 국제법 관련 국내판결이나 외국에서 대한민국이 당사자가 되었던 판결, 한국이 경험한 국제법 관련 사건들을 수집해 왔다. 이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판결이나 사건보다 학술적 논점으로서의 가치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가급적 한국 사례를 이 책에 수록해 소개도 하고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다. 언젠가는 한국의 국제법 실행을 종합 정리한 저술을 만드는 일은 필자의 여전한 꿈이다.
필자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내심 목표로 했던 점 또 하나는 읽기 편한 좋은 문장의 교과서 집필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법학 책은 초심자에게 매우 어렵다. 필자 역시 50년 전 법학공부 초년 시절 교과서들이 너무나 어려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법학 책은 좀 읽기 편하게 만들 수 없는가? 좀 명쾌하게 내용 전달이 잘 되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는가? 왜 법학 책에는 지루한 만연체 문장만 가득할까?
법학은 기본적으로 외래 개념에 입각해 있고, 국제법은 특히 외국어 판결문과 조약문의 활용이 많아 신문 잡지 기사처럼 술술 읽히는 설명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필자로서는 간결하고 쉬운 표현의 사용에 유의하며 이 책을 집필하려고 노력해 왔다. 전문용어가 아닌 한 생경한 한자어는 가급적 사용을 회피하고, 한 문장의 길이는 최대 3줄을 넘기지 않으려 했다. 한 단어, 한 글자라도 덜 사용하고 같은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경제적 문장 작성에 신경을 쓰고 있다. 사실 필자의 희망 사항 중 하나는 적은 분량 속에도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외국의 정평 있는 서적과 같은 교과서를 만드는 일이다. 문고판과 같은 작은 책에도 엄청난 내용이 촘촘히 들어 있는 책을 읽을 때마다 내용을 취사·응축시키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했었다. 수식어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면서도 매번 독자를 사로잡는 소설을 써내는 국내 유명 소설가의 문장력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의 능력 부족으로 이 책에서는 아직 의도한 만큼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개정판을 만들자마자 매번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이 바로 눈에 뜨이고, 인쇄 중인 개정판이 미처 출시되기도 전부터 다시 새 개정판 준비를 시작해 왔다.
한편 독자 중에는 「신국제법강의」와 필자의 또 다른 책 「신국제법입문」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망설이는 경우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전체적 골격에서는 양자가 유사하나 「신국제법입문」은 분량이 이 책의 1/3 남짓이므로 아무래도 간추린 내용이다. 학부든 대학원 과정이든 현재 법학을 전공하며 국제법을 시험 대비용으로 학습하거나 국제법 공부에 개인적 관심이 큰 독자라면 영어 판결문이 다소 부담스러울지라도 처음부터 「신국제법강의」를 갖고 공부하기를 권한다. 이로 인해 읽는 속도가 너무 늦어지고 지루하면 일단 처음에는 긴 영어 판결문은 건너뛰며 읽어 각자의 머릿속에 전반적인 내용 골격을 형성한 다음 판결문을 찬찬히 함께 읽어도 무방하다. 반면 대학 교양 수준 정도로 국제법을 알고 싶은 독자는 다소 적은 분량의 「신국제법입문」으로 공부해도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이번 개정판 준비에도 박영사 여러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출판사 업무가 가장 바쁜 연말연시에 한두희 과장은 성실한 작업으로 이 책이 제때 출간되도록 헌신했다. 조성호 기획이사는 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주고 있다. 안종만 회장 등 일일이 거명하지 않은 박영사 임직원 여러분의 노력에도 감사한다. 이 책으로 공부하는 모든 독자에게 2025년은 행운과 성취가 많기 바란다.
2024년 12월 - 제15판 서문(2025년)
국제법 내 다양한 세부 분야 중에서 기본적이고 중요한 분야를 꼽으라면 무슨 대답이 많이 나올까? 현대 국제법의 법원으로서 조약이 갖는 압도적 중요성을 고려하면 조약법이 그중 하나라는 점에 이견을 가질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한다. 오늘날 국제관계의 상당 부분은 조약을 통해 이루어진다. 조약은 국제사회에서의 합의 중 가장 신뢰성과 실행성이 높은 약속이다. 외교 실무가들은 상대국과 교섭을 할 때 양국간 그 분야에 적용되는 조약이 있느냐 여부를 1차적으로 확인하고 시작한다.
회고해 보니 조약법은 필자가 서울대학교에서 첫 번째로 강의한 대학원 과목이었다. 이후 약 25년간의 서울대학교 교수 생활에서 국제법 개론을 제외한다면 가장 많이 강의한 과목이 조약법이었다. 법대 대학원에서 11회, 법학전문대학원에서 3회 이제까지 총 14학기를 강의해 대략 2년에 한 번씩 조약법을 개설한 셈이었다. 필자가 40대 초반 조약법 강의를 처음 시작할 무렵 이 분야에 나름 특별한 지식이나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조약법이 중요하기 때문에 강의를 개설했고, 강의를 계속하다 보니 공부가 되고 관련 자료도 축적되어 갔다. 대학원 강의는 조약법 분야에 관한 필자의 식견을 늘리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전에는 주로 영어로 쓰인 정평 있는 조약법 서적을 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의준비를 위해 이들 책자를 정독해야 했고, 강의를 마치면 수강생들의 보고서를 통해서도 배우는 바가 있었다.
이미 국제적으로 성가가 인정된 영어권 조약법서를 기본교재로 사용하는 경우, 이론적 분석이란 측면에서는 손색이 없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상 아쉬움이 느껴졌다. 아무리 정평 있는 조약법서라 해도 결국은 외국책이었다. 포함된 실행과 판례는 저자의 출신국 사례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제시된 내용이 출신국의 실행에 불과한지 국제적 관행에 해당하는지가 불분명했다. 한국 특유의 사정이나 실행은 거의 소개되지 않았으며, 있다 해도 부정확할 위험이 있었다. 대학원 강의에서 영어 교재를 통한 강의는 수강생들에게 훌륭한 학술서를 직접 접하게 만들고 외국어 독해 훈련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한국의 조약법 실행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별도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대학원 강의라도 한국의 실행이 가미된 국내 단행본이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우리말로 된 조약법서가 대학원 강의나 전공자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주로 국내법만을 취급하는 일반 법조인이나 행정 실무가들이 업무상 부닥칠 확률이 가장 높은 국제법 분야가 조약법이다. 헌법 제6조 제1항이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아무리 국내법만을 다루는 실무자들도 한국이 당사국인 조약의 해석과 적용에 관한 문제에 종종 부딪치게 된다. 한국사회가 국제화될수록 그 빈도는 높아진다. 그 과정에서 때로 조약법에 관한 전문지식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국내법 문제만을 다루던 국제법 비전공자로서는 업무상 당장의 필요를 위해 외국의 정평 있는 조약법책을 급히 구하기도 쉽지 않지만, 있다 해도 이를 단시간 내 이해하고 눈앞의 사례에 적절히 적용하기는 더욱 어렵다. 국내 실무가들을 위해서도 우리말로 된 조약법서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조약법서 집필이 한국사회에서 필자에게 요구되는 임무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에 10여 년 전부터 조약법에 관한 개설서 집필을 구상했고, 그 첫 번째 결과가 2016년 발간된 「조약법강의」였다. 이 책에는 좀 더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지 못해 여러 아쉬움이 남았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조약법서를 집필하기로 했다. 본 책자는 7년 전 「조약법강의」에 크게 바탕을 두기는 했으나, 체제나 내용 설명, 수록 자료에 있어서 적지 않은 변화와 확장을 도모했기에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심정으로 제목도 「조약법: 이론과 실행」으로 고쳐 잡았다. 설명 중간에 적지 않은 국내외 판례를 발췌 수록한 이유는 조약법 이론이 실제 적용되는 현실을 직접 맛보라는 의미이다. 정년을 하면 시간적 여유가 많으리라 기대했었는데, 예상외로 번잡스러운 생활이 계속되어 이번에도 기대만큼의 시간을 투여하지 못한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이번 「조약법: 이론과 실행」 발간은 특별한 과정을 겪었다. 필자는 이 책의 원고를 작년(2022년) 초여름 탈고해 출판사로 넘겼고 여름 끝 무렵에는 초교지를 받아 교정도 진행했다. 그때 외교부 국제법률국으로부터 한 가지 소식을 접했다. 국제법률국에서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의 번역 수정작업을 가급적 2022년 내로 완료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외교부에서 조약법 협약을 포함한 중요 조약의 기존 번역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고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내부적 일정은 정확히 몰랐는데, 이 책자가 발간되자마자 비엔나 협약 국문본이 수정된다면 이 또한 곤란한 일이었다. 대중적으로 널리 팔리기 어려운 책자의 성격상 쉽게 개정판을 쉽게 만들 수도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외교부 번역 수정작업을 반영한 후 간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영사에 이러한 사정을 알리고 교정작업을 당분간 중지해도 좋다는 양해를 받았다. 그런데 외교부의 비엔나 협약 번역 수정작업이 예상보다 진척이 느렸다. 결국 금년 6월 9일에 새로운 번역본이 관보에 공고되었다. 당초 생각보다 반년 정도 작업이 더 늦어진 셈이었다. 비엔나 협약 새 번역본이 관보에 공고되자 작년 초교지를 다시 꺼내 수정된 표현을 반영하는 작업을 했다. 이 작업은 단순히 협약상 표현만을 고치는 일로 그치지 않았다. 첫 원고 탈고 이후 근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새로 수집된 내용을 반영해야 했다. 그 양도 적지 않았다. 결국 단순한 교정이라기보다 개정판 원고작성이 진행된 셈이 되었다. 내용이 보다 충실해졌고, 개인적으로는 좀 더 만족스러운 결과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또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전세계 외교관들이 조약법 분야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참고하는 서적의 하나가 영국인 A. Aust의 「Modern Treaty Law and Practice」이다. 필자 역시 별도로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는 본서 각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자로 생각된다. 마지막 3판이 10년 전 발간되어 개정판이 나오지 않으려나 궁금해 했는데, 필자가 재교까지 마친 상태에서 J. Hill이란 새 필자를 통해 「Aust’s Modern Treaty Law and Practice」 4판(2023)으로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잠시 고민에 빠졌었다. 새 판을 구입해 이를 반영한 원고를 다시 만들어야 하나? 그러면 작업이 최소 몇 개월이 지연되고, 재교까지 마친 상태에서 한번 더 개정을 하는 결과가 될 듯했다. 그러기에는 상업성 없는 이 책자를 발간해 주는 박영사에 너무 미안했다. 이에 A. Aust 자신의 책은 10년 전 3판으로 끝났고, 이번 새판은 Hill이라는 다른 사람의 작품이므로 필자는 이번에 A. Aust의 책자까지만을 반영하는 것으로 작업을 마치기로 결정했다. 언젠가 누가 그랬다. 완벽한 책을 내지 못해도 일단 결과물이 나오면 이를 바탕으로 후일 다른 후학들이 이를 뛰어넘는 결과물을 내리라고. 국내 학계 후학이 조만간 이 책자를 양과 질에서 능가하는 조약법서를 내주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유난히 습하고 더웠던 금년 여름 박영사 한두희 과장은 까다로운 이 책자 제작에 남다른 심혈을 기울여 작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노고에 감사한다. 언제나처럼 조성호 이사는 상업성 이 의심되는 이 책자 발간에 든든한 후원 역할을 했다. 이 분들 외에도 드러나지 않는 박영사 관계자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표한다.
2023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