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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갔던 올 여름, '장강명'이라는 작가가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소설이 첫번째로 주목을 받았고, 뒤이어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출간되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작가 장강명을 만났습니다. 인터뷰는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도와주셨습니다. | 알라딘 도서팀 김효선, 박하영 작가적 '야심'을 말하는 작가 안녕하세요. 어제도 ‘북한 사격’이라는 큰 뉴스가 있었습니다. (주 : 이 인터뷰는 북한 발 포격 뉴스가 세상을 점령했던 8월 21일 금요일 오후 진행되었습니다), 늘 그렇듯 요즘도 이런저런 소식이 많은데요. 장강명 작가라면 이 사건을 소설적으로 분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데뷔작인 <표백>부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으로 표기)까지, 장강명의 소설은 현실을 연상시키는 특정 ‘사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잦은 것 같습니다. ‘뉴스’를 보는 눈이 남다를 것 같아요. 사건기자를 오래 했어요. 사회부, 정치부, 산업부에 주로 있었죠. 내근부서나 소프트한 피쳐 기사를 쓰는 곳 말고, 현장기자로 지냈어요. 그래서 훈련이 될 수밖에 없었죠. 사회 트렌드, 관심 가는 사건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주목하는 저널리스트의 태도가 몸에 밴 거죠. 제가 애초에 신문기자가 되기로 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사회가 크게 변화하고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싶을 때가 있잖아요. 주변에서 지진이 났는데도 모르고 지나가고 싶지 않았어요. 큰 일이 일어나고 세상이 변할 때 제가 중심에 있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기자가 쉽게 되지는 않았어요. 열심히 준비했는데 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졌죠. 최종만 다섯 번 떨어지고 일단 취업을 했어요. 그래도 기자가 되고 싶어서 사표를 내고 나와 지원을 했는데 또 떨어졌고요. 고시원에서 준비를 했는데, 백수로도 지내고 영어 교재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러다가 기자가 됐죠. 기자 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했고 나름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전업 작가가 된 지금도 신문 기자들에게 더 동질감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이슈를 관심 있게 보고, 활용하려고 해요. 실은 엑셀 마니아라 모든 걸 엑셀로 하는데요, 소설로 쓰고 싶은 아이템을 엑셀로 정리해놓고 관리하고 있어요. 소설의 모티프가 될 만한 뉴스 기사는 링크로 저장해두고요. 이야기의 다양한 스펙트럼도 눈에 띕니다. <표백(2011)>, <뤼미에르 피플(2012)>, <열광금지, 에바로드(2014)>, <호모 도미난스(2014)>, <한국이 싫어서(2015)>,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2015)>, 모두 한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기엔 색이 다양합니다. 현재 ‘좀비물’을 연재하고 계시기도 하고요. 독자의 취향은 다양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 다양한 작가들이 장강명의 소설 모두를 좋아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소설들 중 ‘어떤’ 소설만큼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저의 작가적 전략이긴 해요. 결과적으로 독자가 다양해지면 좋겠지만, 독자층을 생각해서 다양한 소설을 쓰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나중에 정말 ‘큰 걸’ 써야 된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아요. 운동에 비유하자면, 이 운동은 상체근육용, 이 운동은 하체근육용, 이건 근지구력용 하는 식으로 단련하는 방법이 나뉘어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소설을 쓰는 데에도 다양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인파이터인데,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그라운딩 기술을 쓰든, 타격기술을 쓰든 받아낼 수 있는 종합격투기 선수처럼 소설을 쓸 수 있도록요. 저의 ‘작가적 야심’ 중의 하나가, 죽기 전에 <레 미제라블> 같은, 커다란 주제를 담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거든요. 십 몇 년 간 대한민국의 모습이 어땠는지 기록하는, 다른 사람이 보면 정말 큰 오페라 같은 소설이요. 정치부 기자로 오래 출입을 했는데, 저 같은 경험이 있는 소설가가 별로 많진 않잖아요. 한국 언론 얘기를 한번 써보고 싶고, 정치 얘기도 한번 써보고 싶어요. 가까이 가서 정치를 보면 그렇게 추잡하지만은 않거든요. 한국 언론도 그렇고요. 좋은 의지를 가진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다 결국은 망해가는 그런 장엄한 드라마. (웃음) 지금은 못 쓸 것 같아요. <표백> 전에 쓴 신문사 얘기가 있는데, 너무 못 썼더라고요. 제 글을 먼저 봐주는 아내도 혹평을 했고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써야죠. 북한이라는 소재로도 소설을 쓰고 싶어요. 북한 문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거든요.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없잖아요. 에티오피아 같은 나라 하나랑, 그래도 선진국 끄트머리에 있는 나라랑 붙어 있는. 온갖 얘기를 할 수 있겠죠. 탈북자 커뮤니티도 갈등이 많고, 이야깃거리가 많아요. 그들을 취재해서 난민의 눈으로 남한사회를 보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고, 스스로 나라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고, ‘한 사회가 붕괴할 때 사람이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고요. 관련한 강연회가 있으면 열심히 가고 있어요. 고난의 행군이라든지, 북한 얘기, 정치 얘기. 쓰고 싶은 주제가 여러 개 있어요. 쓰고 싶은 이슈들이 여러 개 있어요. 다만 제가 아직 작가로서 근육이 튼실하다는 생각이 안 들거든요. 여성 캐릭터도 잘 다루고, 악당 같은 캐릭터도 잘 써보고 싶어요. <한국이 싫어서>를 쓰기 전까지는, 제가 여성 캐릭터를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어요. 전에 쓴 소설의 여성 캐릭터들이 잘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거든요. <한국이 싫어서>를 쓰고 난 후, 앞으로 저의 성격을 빼닮은-되바라진 여성 캐릭터의 한 전형은 쓸 수 있겠다 생각을 했죠. (알라딘 : <열광금지, 에바로드>의 ‘경희’라는 여성 캐릭터는 좋았어요) 그 캐릭터는 편법이었죠. 정확히 그 여자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고, 쇼킹한 설정 한 두 개로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후배랑 연애를 하거나, 머리를 빡빡 밀거나 하는, 그런. 전형적인 것을 살짝만 피해 가서 인물을 만드는 식으로 썼어요. <한국이 싫어서>를 쓸 때는 바짝 기합을 넣고, 캐릭터를 썼어요. 게임이나 아이돌 산업 등에 대해서도 정말 여러 가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양한 소재들을 쓰고 싶다는 게 제 작가적 욕심이고요. 그 욕심의 길이 제 앞에 있다고 한다면 아직 반의반도 못 온 것 같아요.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려면 정말로 튼튼한 정신적 근력, 물리적인 근력이 필요하고. 소설을 쓰기 위한 ‘몸 만들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의 저를 운동선수로 친다면, 아직 9라운드 게임에 서기엔 체급이 안 돼서 3라운드 게임에 도전하는 아마추어 선수가 아닐까 해요. 큰 소설을 쓰기엔 아직 체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쓰고 싶은 소설을 쓰기 위한 작가적 욕심과 전략을 계속 만들어나가야겠죠. <한국이 싫어서> 그리고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한국이 싫어서>에 관해서 묻고 싶습니다. 제목도, 문제의식도 도발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글은 유쾌하고 희망적으로 읽혔어요. 1인칭 여성화자가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는 수많은 사건들(동양종금 등)을 발랄하게 엮어가며 이야기하는 방식이 신선했어요. 같은 ‘청년’에 대한 얘기지만, <표백>과는 방향성이 다르다는 점도 재밌었고요. <한국이 싫어서>는 경장편(주 : 원고지 500매 가량 분량의 소설)이라는 민음사 기획 덕분에 나온 소설 같아요. (주: 민음사는 ‘오늘의 젊은 작가’라는 타이틀로 경장편 소설을 출간하고 있으며, <한국이 싫어서>는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소재나 주제는 이전에도 생각해두었던 거니까, 제안이 오진 않았어도 소설로 쓰긴 썼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딱 원고지 500매라는 분량의 제한 안에서 기승전결을 갖춘 소설을 쓰려니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게 있더라고요. 얇고 가벼운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니, 독자가 ‘판타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가 됐어요. 좋은 시도였던 것 같아요. 은행나무 노벨라(주 : 배명훈 작가의 <가마틀 스타일>을 시작으로 10권이 출간된 한국소설 경장편 시리즈물)도 비슷한 기획이잖아요. 경장편을 <한국이 싫어서>로 처음 써봤는데, 이 소설을 쓴 경험이 있어서 비슷한 500매 가량의 <그믐…>을 쓸 수 있었죠. 작가에게는 자극이 되는 프로젝트였던 것 같아요. 은행나무 노벨라에서 원고 제안을 받았을 때도 경장편을 써본 경험이 도움이 됐어요. 마침 첫 권이 <가마틀 스타일>이기도 했고, SF를 써도 된다고 해주셔서 SF를 썼죠. (주 :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로 장강명 작가의 신작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6개월 전만 해도 제가 쓴 SF 소설을 출판할 출판사를 찾기 힘들었을 거에요. 출판사에서 내주신다고 하니까 마음을 놓고 썼죠. 저에게도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하고 싶은 작가적인 욕구가 있는데 민음사, 은행나무 같은 출판사에서 받은 원고 의뢰가 좋은 기회가 됐어요. 야구로 치면 트리플A에 해당하는 리그잖아요. 500매라는 한에서 젊은 작가에게 기회를 주는 시리즈 덕이 아닌가 해요. <뤼미에르 피플>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이야기는 환상적이지만 이야기 자체는 철저하게 현실의 공간, 신촌이라는 곳에서 출발하고 있어요. <그믐>에서도 ‘마포’라는 공간이 중요하게 등장하고요. 환상적인 소재도 거침없이 사용하지만, 이야기의 기저는 철저하게 현실적인 곳에서 출발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소설을 읽은 후 ‘신촌’을 지날 때면 소설이 생각나곤 했어요. 제가 ‘르메이에르’ 오피스텔 13층에 살았어요. 신촌에 살다가 마포구 현석동으로 이사갔고요. (웃음) 환상적이면서 현실적인 이야기는 제가 추구하는 지점이에요.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 같은 테마를 반복해 쓰면서 ‘쓸 게 없어서 이걸 쓰는 건가’ 하는 느낌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어요.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얘기를 제가 좋아하고,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데요. 한편으로는 주제가 명확한, 엄청 현실적인 얘기도 쓰고 싶어요.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의 카테고리가 여럿인 거죠. 몽환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몽환적인 얘기일수록 굉장히 현실적인 점이 있어야 몽환성이, 환상성이 더 강조된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묻겠습니다. 세 사람이 각각이 축이 되어 이야기를 이어가는데요. 명확하게 줄거리를 정리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명확함이 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읽는 독법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습만화 편집자로 일하는 ‘여자’의 에피소드 중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요. 작두로 철을 잘라낸 원고가 뒤섞였는데, 뒤섞인 대로 이야기가 읽히는.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서사에 관한 물음으로 읽혔습니다. <그믐>이라는 소설의 시작 자체가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였어요. 아내가 동창들을 만나고 왔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다른 친구에게 “네가 예전에 누구 왕따 시켰던 거 기억나냐”고 물었대요. 가해범으로 지목 받은 동창은 자기 그런 적 절대 없다고 그랬고요. 둘의 기억이 엇갈리잖아요. 아내가 되게 신기한 일이 있었다고 그 얘기를 해주었는데, 주관적 서사와 객관적 사실의 괴리가 재미있어서 소설 소재로 참 좋다는 생각을 했죠. 거기서 시작을 하다 이 소재를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주관적 서사가 없는 사람을 생각했어요. 시간을 거슬러갈 수 있어 언제나 사건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을 생각했고, 그 사람 관점에서 이야기를 생각하다 보니 ‘이야기 순서의 앞뒤가 없는 소설’의 원고가 틀어지는 원고도 생각하게 됐어요. 장강명 작가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건설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동아일보에 입사해”라는 저자의 약력 또한 흥미있게 보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이 소설은 세 명의 인물, 세 가지 주제어가 반복되며 마치 건물처럼 ‘설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자, 여자, 어머니. 세 명의 보람. 세 사람의 키워드 같은 면, 아래 문장 같은 면들이요. 기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셔틀버스와 버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내내 그 문장을 곱씹었다. 단어들만이 순위를 바꾸었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제가 의식적으로, 제 전공처럼 글을 쓰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생각하고, 엔지니어처럼 구조를 만드는 게 있긴 한 것 같아요. 그런 방식으로 쓴 소설이 <한국이 싫어서> 였는데, 이 소설은 설계의 결과였던 것 같아요. 제목을 정하고, 제목에 맞는 상황과 주인공 정하고. 주인공을 통해서 보여줘야 하는 게 있으니 등장인물로 친구들, 동생, 남자친구, 호주에서 만난 애들을 정하고. 서술구조도 왔다 갔다 하게 정하고요. <그믐…>에서 세 개의 단어가 한 장을 이루는 패턴은 처음부터 정해놓고 시작을 했어요. 제가 작업하는 방식을 생각하면, 딱히 나쁜 방식인 것 같지는 않은데, 예술가스러운 방식은 또 아닌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해지긴 해요. (웃음) ‘캐릭터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아’, ‘종이 위의 캐릭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작업을 하진 않아요. ‘얘는 여기서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호주로 가야 돼.’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죠. 짜놓은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소설을 쓸 때도 있었어요. <뤼미에르 피플>을 쓸 때는 단편 몇 개는 뜬금없이 끝내는 것도 없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썼다고 해서 덜 힘이 들어가거나 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한국이 싫어서>가 나중에 퇴고하면서 더 힘이 들었고, <뤼미에르 피플>이 제가 보기에 구조가 되게 허술해 보인다거나, 긴장감이 없다거나, 이상하게 끝나는 건 또 아닌 것 같았어요. 요리할 때요. 쉐프 중에서도 계량기로, 거의 공학적인 관점에서 요리를 개발하시는 분이 있잖아요. 물리적으로, 분자요리를 하는 것처럼요. 이 요소를 빼고 다른 요소를 넣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소설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믐…>을 쓸 때는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전반부랑 후반부 챕터 길이가 좀 다른데요, 후반부 챕터 길이가 좀더 길어요. 3.3.의 구성으로 인물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었고, 한 챕터 안에서는 하나의 시공간, 한 인물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한 챕터 안에서 데이트를 하다 납골당에 갔다 돌아올 때까지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납골당 가는 장면과 남자와 여자가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을 끊고 싶었는데 형식 때문에 붙여두었죠. 문학동네에서 교정을 굉장히 여러 번 봤는데, 어떤 편집자는 거기를 잘랐어요. 한 챕터지만 결이 다르니까요. 그 교정자가 그렇게 본 것도 이해를 하고, 사실은 한 챕터로 들어가기 이상한 얘기라고도 생각했는데, 형식적인 균형감을 맞추기 위해서 붙이고 싶었어요. 나름의 변명으로, 우주알 이야기 원고가 작두로 잘린 부분에 ‘패턴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다. 뒤로 갈수록 길어지는 것 같다’ 이런 말을 넣어두었죠. (웃음) 책의 제목이 독특한데요. 그믐달이 비치고, 우주알을 타고 오는 이야기를 먼저 쓰고 있었고.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아내에게 들은 동창생 얘기를 쓰고 있었는데, 거기에 남자 얘기를 쓰게 되면서 합쳐졌어요. 출판사에서는 제목이 너무 길다고 바꾸자고 해서 바꿀 생각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적당한 게 안 나오더라고요. 제목이 좀 길어서 그렇지 저는 좋더라고요. <그믐…> 에 대한 평 중에 ‘속죄’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요.. 단어가 주는 느낌이 조금 좁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해석에 대해선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려고 하는데요. (웃음) 제 소설은 언제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믐…>도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 두 사람과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 한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고민하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가 경험하고 있는 일도 그렇죠. 제 미래도 언젠가 결정이 될 거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잖아요.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다 해보고 존엄사를 추구할 것인가, 최후의 순간까지 생명연장을 하며 끈질기게 살 것인가… <그믐…>에서 남자가 맞닥뜨리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제 소설의 테마인 것은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와 같습니다. 저는 사는 게 사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왜 살아야 하는지, 살아야 될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서만 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언제나 그대로 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한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제 답은 통째로 긍정하는 거예요. <표백>이 세대론에 대한 얘기가 아니지 않듯, <그믐..>도 속죄에 대한 얘기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에서 떨어진 얘기가 아니라는 것, 속죄를 제대로 하려면 과거에 내가 입힌 피해가 현재진행형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 나의 가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 피해가 현재진행형으로 한 사람에게 벌어지고 있고, 내가 속죄를 하려면 내 가해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점에 관한 얘기를 하고도 싶었어요. 보다 다양한 해석을 독자들이 해주시면 저는 좋고요. (웃음) 그렇지만 제가 소설을 쓰면서 항상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얘기라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열광금지, 에바로드>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예정된 형태로 진행되는 운명. 그 운명 앞에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어린 남녀’ 같은 설정이요. 이 소설은 결국 연애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며 읽기도 했습니다. 그 테마에 제가 좀 혹해 있어서, 다른 데도 많이 나옵니다. (웃음) <뤼미에르 피플>의 제일 마지막 단편도 무당이 먼 미래를 보고, 자기가 1999년에 죽는 걸 아는데, 죽기 1년 전에 프랑스 수도사랑 연애를 하기로 결심하고 프랑스로 가는 얘기예요. 예정된 결말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죠. <표백>의 세연도 언제 죽어야지 날짜를 정해놓고 실행하는 인물이고요. SF에서 자주 보는 테마여서 그런 것 같아요. <당신 인생의 이야기>도 외계 언어를 읽다 미래를 보게 되는, 딸의 미래를 보게 되는 이야기였죠. <듄>의 황제도 <그믐...>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왕국과 자신의 아이들을 살리려면 중간에 아내가 죽고 자기가 눈이 멀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죠. 왕인 자신만 살려면 자기가 배신자를 미리 처단하면 되는데, 황제는 사막으로 갑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였죠. SF를 보면서 자주 보던 테마에 제가 혹했고, 저는 저대로 그 테마가 인간의 운명 얘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우리는 다 죽잖아요. 결국 이별할 건데 아둥바둥 열심히 살잖아요. 저는 겁이 많아서, 개를 너무 좋아하는데 개를 키우면 결국 개가 죽게 되니까, 그 이별이 너무 싫어서 못 키우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용기를 내 키울 생각이지만요. 아내가 유학을 갈 때도 헤어지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헤어지고, 계속 만나고 했었고, 이런 식의 딜레마를 여러 번 겪기도 했어요. 제 소설에 반복되는 테마들이 있죠. 20대 얘기도 제가 혹해있는 테마고요. 자살도 그렇고요. <그믐…>도 사실상 자살이고, <뤼미에르 피플>의 단편 상당수도 사실 자살이잖아요. 죽을 때, 죽기 직전에 인생을 반복할 때 이 인생을 똑같이 다시 살 생각이 있느냐고, 모든 걸 그대로 반복해야 하는 조건으로 다시 살라고 하면 과연 그렇게 할까요?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안 돌아간다고 대답을 한대요.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요.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는 거죠. 제가 지금 마흔 살인데, 육십 살이 된 저에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겠느냐,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은 삶이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긍정하고 싶어요. 제가 현재 겪는 어려움이 있고, 불편함과 두려움도 있고 한데, 총체적으로는 지금 이 순간을 ‘살만한 순간’으로 기억하고 싶어요.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면 어떤 면에서는 그 비극성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쓰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 짧고 정확하고 잘 읽히는, 이야기의 속도감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걸 더 중요하고 생각하는, 그런 문장이요. 문장도 그렇고, 챕터도 그렇고, 제 성격의 반영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자 생활 때문인 것도 같고요. 메시지가 선명한 책은 좋아하지 않지만, 단위로, 문장으로 끊었을 때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딱 떨어지게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아직 소설가로서 3라운드 게임을 못 벗어나고 있고요. 9라운드 게임을 해도 중간에 헤매지 않고, 매 챕터를 제가 장악을 하고, 긴장감을 잃지 않은 채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데 아직 그건 안 되는 것 같아요. 드라마도 연장 방영하면 주인공이 늘어지는 걸 넘어서서 이중인격자가 되고 캐릭터가 붕괴가 되잖아요. 그런 게 없게 쓰고 싶어요. 말씀하신 대로 기자로서 글쓰기를 오래 하셨잖아요. 소설가의 글쓰기는 방식이 다를텐데, 의식적으로 다르게 쓰려고 하시나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표백>이나 <열광금지, 에바로드>를 지금 보면 고치고 싶은 문장에 되게 많아요. 기자 식 문장이에요. 고유명사를 정확하게 쓰려고 하는 습관이 있었죠. ‘사 마셨다’로 쓰면 되는데, ‘오후 2시 합정역 3번출구 인근 GS25에서 사 마셨다’라고 쓰는 식으로요. 기자 생활을 하며 이런 훈련을 많이 해서 ‘사 마셨다’라고 잘 못 쓰겠더라고요., 의식적으로 벗어나려고 하고 있죠. 기자적 글쓰기의 명확한 묘사, 늘어지지 않는 긴장감은 계속 가져가려고 하고요. 전반적으로 단호한 문장을 좋아하는 게 성격의 반영인지, 기자 글쓰기의 반영인지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한 게, 기자를 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요. 기자로서 훈련을 받으면서 저 자신도 단호해졌고, 제가 후배를 ‘깰 때’도 단호함을 중요하게 생각했고요. 수습 기간에 ‘사스마리’(주: 경찰 출입 기자)나 ‘하리꼬미’(잠행취재)를 하는 기간도 저는 성격 개조작업인 것 같아요. 20대 후반에 처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의 성격이 단호하지 않거든요. 기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라면 관찰력도 좋고, 문장력도 좋으니 사실은 글쓰기에 대해서는 가르칠 건 없어요. 공부도 많이 했고, 똑똑하잖아요. 그 순간에 가르칠 건 단호함입니다. 수습기간에 관찰을 많이 해요. 그리고 그 관찰한 내용을 선임에게 불러줍니다. “지금 경찰이 뭘 어째가지고요, 뭘 어쨌고요, 얘는 얘한테 200만원을 줬다고 하는데요.” 그러면 물어보죠. “걔가 거짓말하는 거야?” 그러면 보통 머뭇거려요. “그건 아니고요.” 그러면 다시 묻죠. “서로 말이 다르잖아. 누구 말이 틀린 거야?” 여기에 바로 답을 하기 어려워요. 단호해지지 못하기 때문이죠. 자기가 자기 문장으로 현실을 만드는 순간 현실을 재구성하게 되는 거잖아요. 현실을 규정하려면 성격이 엄청 강해야 됩니다. 제가 어떤 사람의 기자회견을 봤어요. 이 사람이 자신은 여자친구를 때리지 않았다, 이런 내용을 발표할 때 “모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거짓말로 일관했다”라고 기사를 시작할 수 있죠. 이런 문장을 쓰려면 내가 너의 말을 거짓말로 규정해주마, 하는 단호함과 배짱이 있어야죠. 그 배짱을 몇 달을 잠을 재우지 않고, 혼을 내면서 성격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이렇게 사건을 규정할 담력이 되지 않으면, 사건 기자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고요.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사람의 성격이 바뀌어서 어지간한 일에는 잘 안 흔들리게 돼요. 제가 소설을 쓰는 것은 제 주변의 세계를 제가 규정짓는 작업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싫어서> 라고 명명하면 한국이 ‘헬조선’이 되는 거죠. 제가 늘 해오던 작업이기 때문에 이 작업이 두렵진 않았어요. 제 문장은 단호한 문장이고, 세상을 규정지으려는 문장이에요. 제 문장에는 권력의지가 담겨있어요. 어떤 소설들은 멀리서 어떤 풍경을 그리죠. 저는 이런 소설을 보면 아름답지만 권력의지가 없는 문장을 봅니다. 그 문장이 나온 과정도 이해해요. 어떤 아픈 현상이 있을 때 아프게 묘사하고 싶은 작가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렇지만 그게 저의 의지하고는 매우 달라요. 저는 비극을 현상 그대로 독자에게 번역해서, 언어라는 심상으로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가가 아니에요. 슬픔에 대해서도 넌 슬프고, 넌 비겁하고, 너는 지금 용기가 없는 거다. 이렇게 규정짓고 정리해서 보여주고 싶어요. 기자일 때 성격이 바뀌었고, 성격이 바뀐 결과 이런 문장을 쓰게 됐어요. <그믐…> 작가의 말에 소설을 쓰는 세 번째 이유가 ‘돈’이라고 하셨죠. 소설을 쓰는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는 뭘까요? 아까 말씀 드린 ‘권력의지’와 비슷합니다. 제게 세계를 규정짓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요.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게 되는 차원을 저는 ‘실존계’라고 부르는데, 실존계에선 제가 너무나 허무주의자고, 사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죽을 순 없고, 어쨌든 살아있으니 이유가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의미가 있다고 가정하고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소설을 씁니다. 실존계를 토대로 그 위에 쌓아 올린 ‘의미계’에서는 초월, 진보, 사랑, 공동체 같은 가치를 삶의 이유로 내세우죠. 무언가 의미를 찾는 작업을 하다 종교를 믿을 수도 있고, 사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요. 의미계는 사람이 규정하기 나름이니, 그 의미계 안에서는 제가 규정하는 이미지대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잖아요. 소설쓰기가 저를 둘러싼 의미계를, 제가 보기에 더 의미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 된다는 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결국 책이다 독자 통계를 보니, 장강명 소설의 주 독자층은 20대, 30대였어요. 앞으로 보다 넓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10대 독자, 40대 남자 독자가 좋아할 소설도 쓰고 싶어요. 제 소설의 주 독자층이 20대 30대 여성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이 사람들이 ‘한국문학’, ‘문단문학’의 독자들이라는 생각도 해요. 지금은 40~50대 남자 독자가 좋아할 만한(?) 남북관계에 관한 스릴러를 쓰고 있는데, 여기서 제 소설가로서의 근력부족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상반기에 끝내려 했는데 이제 절반 정도 쓴 상태네요. 10대에게 읽혔으면 하는 웹소설도 쓰고 있고요. 진입장벽이 높은 시장인 것 같아요. 나름의 역발상인데요. 전업작가를 한다고 할 때도 주변에서 엄청 걱정을 했어요. 저도 물론 걱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어요. 한국소설이 안 팔린다는 말이 많으니, ‘이렇게 안 팔리니 내가 조금만 팔리면 나에게 관심이 모일 것이다’하는 생각을 했고, 제 생각처럼 됐어요. <한국이 싫어서>가 아주 많이 팔리진 않았어요. 전체 베스트셀러 순위로 봐도 그런데, 정말 가뭄에 콩이 하나 나니까 사람들이 ‘우리 콩 예뻐’하고 호의적으로 봐주는 것을 느낍니다. 신문사의 문학담당기자, 서점, 출판사, 문단 안팎, 출판계 전체가 저를 응원해주는 것 같아요. 10년 전, 20년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죠. 제가 작년에 생각했던 거에요. 내가 조금만 팔면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게 되어 있다고요. 제가 어떤 소설로 주목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요. 소설이 영상과 경쟁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많은데요, 영상의 시대에 영상과 경쟁할 수 없으니 서사를 떠나 문장에 치중해야 한다, 이런 논리의 정반대되는 지점을 ‘라노베’(라이트노벨)가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영상이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텍스트라는 게 사람의 감각을 자극시키는 서스펜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쥬라기 공원>도 참 잘 만든 영화지만, 역시 소설이 더 재미있잖아요. 익룡도 나오고 별거별거 다 나오고요 (웃음) 20대 독자들, 고마운 이십 대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책을 선사해야겠다, 라고 말한다면 너무 위선적인 것 같고요. 지금의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열심히 소설을 써서 농장을 가꾸듯, 씨를 잘 뿌리고 수확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최근의 문단 관련 이슈에 대해 ‘결국 모든 걸 책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신 걸 봤어요. 다른 업계에서 문단으로 들어오셨을 때 새롭게 보이는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문학동네 가을호 문단권력 좌담회에 제가 패널로 들어갔어요. 좌담회를 여섯 시간을 했는데, 당이 떨어지더라고요. (웃음) 마지막에 좌담회에 나온 소감을 한마디씩 하는데, 소설가가 소설로 얘기해야지 여기서 뭐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제가 출판 평론가는 아니니까요. 언론계에 있다 출판계에 왔지만, 여전히 몸과 마음이 언론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소설가처럼 소설을 쓰려고 하지만, 제 마인드, 업계를 보는 관점, 행동하는 방식은 여전히 기자처럼 생각하고 기자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알라딘에도 인터뷰 요청을 드리고 취재를 하는 것처럼요. (주: 장강명 작가는 알라딘에 집필 중인 논픽션에 관한 자료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제가 일간지 기자였잖아요. 신문기자중에 다른 업계에 간 모든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일간지 기자가 제일 빠르고, 어느 업계로 가나 그보다는 느리다고요. 일간지는 제품 하나를 하루 만에 만드는 거니까, 출판과는 시간의 흐름이 다를 수밖에 없죠. 그런 속도의 차이가 처음엔 먼저 느껴졌어요. 사람들이 기자가 되게 큰 갑이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제가 기자로 있을 때는 어떤 취재영역에서는 저 자신이 을도 아니고, 갑을병정쯤 되는 영역에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어요. 취재를 할 때도 항상 낮추고, 12시까지 의원님 기다리고 했었죠. 저의 글도 정말 난도질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 익숙해져 있었어요. 기사를 넘기면 차장이 뜯어 고치고, 부장이 뜯어 고치고 해서 글에 대해서 자존감을 과도하게 갖질 못했죠. 내 글은 항상 누군가 뜯어 고치는 것이라는 게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출판계에 오니까 작가의 위치가 약간…황송하더라고요. 대접을 해주시면 물론 감사하지만, 프로토콜이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 글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도 편집자가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 같았고요. 레이먼드 카버의 글을 편집자가 뜯어 고친 게 과연 옳은 일이냐 하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지만, 작가의 글에 대해서 편집자가 과도하게 발언을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듭니다. 제가 11년 동안 글을 ‘뜯어고침’ 당해본 결과 차장, 부장의 지적이 굉장히 예리하게 지적할 때가 많았습니다. 단순한 교정교열이 아니라, 맥락이나 방향을 틀려고 할 때가 있는데요. ‘강명, 이게 아니라 이렇게 봐야 하는 거 아니냐? 여기서 이런 애랑 인터뷰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런 조언을 해줄 때, 물론 항상 그 말에 동의하진 않는다고 해도, 열에 세 번 정도는 정말 훌륭한 조언이라고 받아들일 때가 있었어요. 출판사에서는 그런 조언은 못 받아봤던 것 같아요. 제가 원고를 잘 써서 못 받은 걸 수도 있겠지만 (웃음) 사소한 영역은 조언을 받았지만 큰 틀에서, 결말 뒷부분을 완전히 고쳐야 한다든지 그런 조언은 대체로 안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알라딘 16주년 특별 책자 <끝내주는 책>에서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를 열렬히 추천해주시기도 했는데, 다른 소설을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를 좋아합니다. 논픽션 작가 중에 좋아하거나 모범으로 생각하는 작가가 있으신지요? 조지 오웰이요.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정말 좋아하고, 그런 책을 하나 쓰고 싶어요. 정말 문장이 쉽고, 재밌고, <1984>같은 SF도 썼고, 르포르타주도 썼고… 아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작품에 관해서도 들을 수 있을까요? 지금은 소설과 소설이 아닌 것을 같이 쓰고 있어요. 남북통일 스릴러와 문학상 관련 논픽션이고요. 소설을 쓰는 게 조금 더 힘들기 때문에, 소설을 쓰다가 에세이를 쓰는 식으로 쓰고 있어요. 제 작가적 욕심 중에 논픽션이 되게 큽니다. 기자일을 계속하는 느낌이고요. 앞으로도 자주 독자와 만나시게 될 텐데요. ‘장강명’이라는 작가를 발견한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돈 값 하는 작가, (일동 폭소) 책값이 안 아까운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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