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역사학회 회장, 송원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된 저작으로 《남송시대 복건 사회의 변화와 식량 수급》, 《왕안석 자료 역주》, 《왕안석 평전》, 《송명신언행록》, 《아틀라스 중국사》(공저) 등이 있다.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다. 심지어 중국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땅에서 살았던 레닌도 그에 대해, ‘중국 11세기의 개혁가’라 칭하고 있을 정도이다. 왕안석은 중국 역사상의 인물 중 역대의 황제 몇 사람을 제외하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등장과 함께 송대의 역사는 급속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는 국가의 모든 것을 뜯어 고쳤다. 정치, 경제, 교육, 군사, 사회 등 모든 것이 개혁이 대상이었다. 이러한 개혁을 두고 통상, ‘왕안석의 신법’, 혹은 ‘왕안석의 변법’이라 부른다. 신법의 도입과 더불어 북송의 역사는 전연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였다. 이후 금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북송의 역사는 왕안석 및 그가 도입한 신법을 둘러싼 논란으로 지새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단 북송뿐이 아니었다. 남송 시대에도 그가 드리운 그림자는 정치, 경제, 문화의 각 분야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면서 북송의 정계는 확연히 두 진영으로 갈라섰다. 즉 왕안석 신법에 동조하는 측 및 그것에 대해 반대하는 측이 그것이다. 이 양 진영을 ‘신법당’과 ‘구법당’이라 부른다. 구법당은 왕안석 및 신법에 대해 실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왕안석 신법이 시행되던 시기 정권은 신법당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신법당에 속했던 인물들은 오히려 소수였다. 대다수의 관료들, 특히 명망 있는 원로라든가 중견 사대부들은 모두 구법당이었다. 이는 무슨 연유에서 그렇게 된 것일까?
우리는 ‘왕안석의 신법’이라 하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개혁’이라고 알고 있다. 심지어 구법당이 신법에 대해 반대한 것도 그들이 대지주 및 대상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즉, 신법은 중소 지주나 중소 상인을 보호하려는 취지를 지니고 있었고, 이것이 대지주나 대상인의 이익을 침해했기 때문에 구법당이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 아직껏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구법당을 대표하는 인물은 사마광, 한기, 부필, 구양수, 소식, 정호 등이다. 모두 한결같이 그 시대 최고의 명신이자 최대의 학자들이었다. 사마광은 유명한 역사서《 자치통감》의 저자이며, 한기와 부필은 왕안석이 집권하여 개혁을 추진할 당시 정계 최고의 원로였다. 또 정호는 동생 정이와 더불어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구법당 진영의 인물들은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학자들이었다. 설마 이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해에 따라 ‘약자의 보호’라는 선의를 지닌 신법에 반대했으랴? 하물며 그들이 신봉하는 유학, 그리고 성리학은 천하 창생(蒼生)을 향한 인의(仁義)를 표방하는 것이지 않는가. 그들이 계급적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신법이 창생에게 절대적 선(善)이었다면 그것에 대해 전면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신법당과 구법당의 대립을 계급적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해석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다. 그러한 해석은 20세기 초중반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던 유물사관에 따른 것이었다. 역사를 오로지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인식해야 된다고 여겼던 시대의 산물이다.
왕안석의 신법이 ‘약자의 보호’라는 사회정책적 측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재정 확충의 추구’라는 지향이 비교할 수 없는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왕안석에게 이른바 겸병지가(兼竝之家), 즉 대지주 및 대상인으로부터 중소 농민과 중소 상인을 보호한다는 정신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재정 확충이 그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집권기를 통해 그는 신법의 시행 실적을 가지고 지방관에 대한 고과를 결정하였다. 신법의 시행 실적이란, 다름 아니라 신법을 시행하여 얼마나 많은 재정의 잉여를 남겼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관들은 왕안석이 지니고 있었던 또 다른 지향, 즉 ‘약자에 대한 보호’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무리를 감수하며 신법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숱한 폐단이 발생하였다. 구법당 인사들이 지적했던 것, 즉 ‘신법이 천하 백성으로부터 원망을 산다.’는 정황이 이러한 구조에서 등장하였던 것이다.
왕안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당송시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것이다. 또한 시인과 사인(詞人)으로서도 결코 무시 못 할 지위를 점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유학자로서도 당대 최고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왕안석은 자신의 학문, 즉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유학의 결정판이라 여겼다. 그의 학문을 신학(新學)이라 부른다. 신학은 북송 중기와 후기를 통해 도학(道學), 즉 후일의 정주학(程朱學)보다 월등히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 그는 자신의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 즉《 삼경신의(三經新義)》와《 주관신의(周官新義)》를 과거 시험의 기본 텍스트로 삼았다. 심지어 문자학에 있어서도 자신의 이해《( 字說》)가 최종적인 도달점이라 여겼다.
이렇듯 박학다식하였던 그는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겼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두고 모두 유속(流俗)에 찌들었다고 몰아세웠다. 이러한 독선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신법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첨예해졌다.
왕안석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 것은 학부 4학년 졸업 논문을 작성할 때부터였다. 이래로 30여년, 그 사이 다른 분야나 주제로 관심을 돌린 적도 많았으나, 왕안석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유지하였다. 10여년 전부터는 틈틈이 왕안석의 평전도 적기 시작하여 이제 거의 막바지 단계에 와 있다. 이 자료집의 출간, 그리고 미구에 완성될 평전을 마지막으로 왕안석에 대한 독서와 관심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이로써 30여년에 걸쳤던 왕안석이란 인물의 탐색을 그만 둔다 생각하니 감회가 없지 않다.
이 책은 왕안석 및 왕안석 신법과 관련한 주요 사료들을 모아 해석한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 원문을 첨부하는 한편, 가능한 한 상세하게 역주를 붙이고자 했다. 이 책을 펴내게 된 데는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코어(CORE) 사업, 즉 대학 인문역량 강화사업을 수행하는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코어 사업의 일환으로서 인문총서의 발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었고, 그 지원을 받아 이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이다. 연구비를 지원해준 코어사업단의 여러 관계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2017년 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