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일본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세계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1941년 도쿄 태생인 그는 고교 3학년 때 토에이 동화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을 보고, 애니메이션의 표현력과 인간의 움직임의 묘사에 깊은 감동을 받고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
대학 졸업 후 도에이 동화에 입사. 〈걸리버의 우주여행〉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71년, 극장용 장편 〈아리바바와 40마리의 도적〉의 원화, 아이디어 구성 담당했다. 이후 A 프로덕션으로 이적하여 다양한 기획과 작품으로 활약하였다. 1973년, 즈이요 영상으로 이적하여 명작시리즈 첫 번째 작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엄마 찾아 삼만리〉〈빨강머리 앤〉 등 여러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메인 스텝으로 참여했다.
1978년, 〈미래 소년 코난〉을 연출해 애니메이션 팬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1979년, 첫 극장용 애니메이션 감독 데뷔작 〈루팡 3세 카리오스트로 성〉로 주목을 받았다. 월간 아니메쥬에 만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연재를 시작한 그는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가 상업적으로 대흥행을 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소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했다.
스튜디오 지브리에서의 첫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가 개봉되어 일본에서 80만 관객을 동원했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유럽 현지 로케이션을 통해 모든 콘티를 구성 각색했다. 이 영화는 실사에서는 표현 할 수 없는 카메라 기법과 리얼한 배경 등으로 미야자키를 일본 애니메이션의 최고 승자로 만들었다.
87년 4월 〈유천 이야기〉를 제작했고, 88 〈이웃의 토토로〉를 개봉하는 등 일본의 모든 극영화를 제치고 국내 영화제의 상을 휩쓸어 센세이션을 일으키다. 이어 〈반딧불의 묘〉를 개봉시켜 역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두 편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마녀 키키의 특급배달〉이 흥행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 그해 일본의 키네마 준보가 집계한 연간 흥행 순위에서 무려 300만 명이라는 폭발적인 관객 확보에 성공하며 79년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이후 20년만에 만화영화가 연간 흥행 순위 1위에 랭크되는 쾌거를 올렸다. 이어 발표한 〈추억은 방울방울〉이 그 기록을 갱신했다.
92년 7월 개봉된 〈붉은 돼지〉가 헐리우드의 〈원초적 본능〉을 제압하며 흥행 기록 갱신. 93년 앙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발 대상 수상했다. 이듬해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이 국내 흥행에서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을 꺾다. 애니메이션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일본 대표로 출품되었다. 1997년 7월 〈모노노케 히메〉가 개봉되어 일본 관객 1천 4백만 명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2년 개봉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일본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우며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여 세계 영화계의 이변을 낳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제 75회 아카데미에서는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