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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이름:김혜순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55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진 (전갈자리)

직업:시인

최근작
2024년 11월 <나만의 미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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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개
1.
현실이 소설보다 더하다고 하지만 이 소설은 현실보다 더하다. 전쟁보다 더하고, 돼지우리보다 더하고, 범죄 현장보다 더하고, 배가 갈라진 닭보다 더하다. 여자의 상처가 폭발할 때 비유는 필요 없다. 삶의 내용들이 압도해 올 때 문학 교실도 필요 없다. 우리가 산다는 건 폭력의 구조 안에 있다는 것, 누군가의 죽음을 깔고 앉아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상처의 정체성 외에는 가진 것이 없다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괴물이라는 것. 산다는 건 살아남은 것이라는 것.
2.
나는 이 책을 간절한 시인이 쓴 타자의 시학으로 읽는다. 무당도 시인도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목소리와 고통에 찬 손님들(생물들과 무생물들)에게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 목소리들 사이에서 타자로 가득 채운 거울이 되려고, 한없이 자신을 비우는 사람이 시인과 무당이다. 그래서 시인과 무당의 ‘들림’은 부재자의 목소리를 ‘들음’에서 오고, 존재자의 고통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들름’으로써 생성된다. 이 인터뷰어는 질문할 때 항상 자신의 ‘무당하기’ 얘기를 먼저 ‘들려준다’. 그리고 ‘들을’ 때는 상상하면서 ‘듣는다’. 대화의 반듯한 자세다. 그래서 이 무당이 나누는 인터뷰들은 고백과 대화와 발명이 같은 장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이 책이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굿을 발명한다고 생각한다. 가짜 굿 말고,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 진짜 굿 말이다. 이제는 성정체성을 넘어, 역사적 죽음들을 넘어, 반생명적 법규들을 넘어, 무당이라는 운명을 넘어, 모든 경계를 넘어, 우주 전체로 자신의 정체성을 넓혀, 신과 자신들 사이를 트랜스하는 존재자들의 신명을 무당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3.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책에 실린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새로운 리얼리즘’을 제안한다. 작가의 목소리로 그 새로운 리얼리즘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이 에세이들을 읽으면 되겠다. 이 책은 일종의 뷔페이지만 작가가 작성한 ‘단일체’ 세상의 모습이다. 작가는 대놓고 자신의 메시지와 사유의 비밀들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인간의 고통이 동물의 고통보다 견디기 쉽다’는 선언. ‘세상의 모든 인간이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범죄에 가담하는 게 가능할까’ 하는 질문, ‘타인의 고통이란 존재하는가’ 하는 의구심. 작가는 이 참담함을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다중적인 정체성을 갖는’ 것, ‘괴상한 것을 존중하는’ 것, ‘탈중심주의자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럴 때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직조하는 ‘문학의 위대한 신비’가 꼭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문학(이야기)은 물, 불, 흙, 공기 다음으로 세상의 다섯 번째 원소’이고, 문학이란 세계를 구할 다정한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4.
한국인들이여, 자 이제, 우리의 진실을 마주할 준비를 하라. 우리가 전 세계에 버린 아이들이 돌아왔다. 지식인, 시인, 예술가, 노마드 소수자, 저항하는 주체가 되어 모국어도 없이 마이크를 들고 돌아왔다. 한국인들이여, 우리가 신봉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혈연주의, 순결주의, 가부장제가 어떻게 우리의 아이들을 비참의 고통에 몰아넣었는지 바라보라. 이산된 자아와 역사 없는 이방인이 된 그들의 비명을 똑똑히 들어보라. 그리고 감내하라. 입양 보낸 그들의 목구멍에서 쏟아지는 분노에 찬 비트를. 그 비트에 얹은 세상에서 제일 긴 여자 힙합 아티스트의 래핑을.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점에서 다성악으로 터지는 그 목소리를. 그리하여 우리는 통곡하라. 그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불길에 온몸을 데이면서.  나는 마야의 낭독을 서울에서 한 번, 코펜하겐에서 한 번 들었다. 그리고 마야의 낭독을 들으며 울음과 웃음이 섞인 이상한 목소리로 화답하는 두 나라의 청중을 보았다. 나는 출생국과 입양국, 두 공동체의 비밀과 거짓말을 들킨 사람들의 미묘한 수치가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우리가 신봉하는 순결한 신부와 정상적인 가족은 원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순결이 어디 있고, 정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는 왜 없는 것을 신봉하여 우리가 낳은 아이를 키우지 않았는가. 왜 장애아, 여자아이, 혼혈아, 비혼모의 아이들을 우선 팔아먹었는가. 그 아이들이 자신마저 미워하게끔 했는가. 그 아이들이 자신마저 믿을 수 없게끔 했는가. 정신병자로 만들고 자살하게 만들었는가. 그러고서도 지금의 한국이 국민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가족주의 휘하에서 아이를 유기하는 폭력을 적극 지원하는 국가를 지금까지 그냥 내버려두었는가. 한국인들이여, 마야가 창조한, 이 영원히 돌고 다시 돌아오는 고백과 절규의 라임과 펀치라인을 들어보라! 우리는 이 노래를 세이렌의 음성처럼 뱃전에 몸을 묶고 들어야 한다.
5.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은 여성의 첫 시집이 어떠할 수 있는지,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훌륭하게 증거해준다. 에밀리 정민 윤의 이 시집은 이미 우리 한국 현대 여성들이 외면한 원형적 표상의 출현을 야기한다. 시간 속에 파묻어놓은 그 여자들의 비명 말이다. 그 목소리와 함께 쓴 시는 여성 시인의 단말마이면서, 기존 언어체계의 해체이며, 여성공동체의 비명이 된다. 에밀리 정민 윤의 여성 시는 인류가 가진 모든 구분에 대한 참혹한 조롱의 울부짖음이 되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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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은 여성의 첫 시집이 어떠할 수 있는지,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훌륭하게 증거해준다. 에밀리 정민 윤의 이 시집은 이미 우리 한국 현대 여성들이 외면한 원형적 표상의 출현을 야기한다. 시간 속에 파묻어놓은 그 여자들의 비명 말이다. 그 목소리와 함께 쓴 시는 여성 시인의 단말마이면서, 기존 언어체계의 해체이며, 여성공동체의 비명이 된다. 에밀리 정민 윤의 여성 시는 인류가 가진 모든 구분에 대한 참혹한 조롱의 울부짖음이 되었다.”
7.
운동가 아버지의 딸이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말하는 여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어떤 항쟁들과 텍스트들과 인물들이 얽혀서 상호텍스트성을 얻어야, 그것들이 말하는 여자의 배아가 되는가? 그 여자가 되어버린 텍스트들은 어떻게 다중 주체가 되어 우리의 가슴을 치는가?’를 증거한다. 민주화운동은 ‘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문학적 사건이 되었다. 이 소설에는 이전의 ‘운동’ 소재 소설에서 보였던 작가 자신의 알리바이 찾기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응시와 해체가 있을 뿐. 『진주』는 차학경의 『딕테』처럼 받아쓰기다. 아버지는 감옥의 빛 아래서 그들의 조서를 받아써야만 했고, 딸은 여자의 말을 다시 받아써야만 해서 스스로 말하는 여자가 되었다. 이 소설은 혁명이 문학에 도착하려면, ‘딸’이라는 여성적 존재의 글쓰기가 필수적으로 요청되었음을 너무나 아름답게 증거한다. 딸의 글은 몽타주와 신택스syntax, 삽입텍스트, 서사의 탈영토화로 혁명한다. 아름답고, 담백하며, 다층적인 서사다. 허구가 아니다. 후일담 문학이 아니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지금의 르포이고, 지금의 시이고, 지금의 신화다. 이들의 다장르, 다매체, 혼합 언어 텍스트다. 이 소설은 작고, 개인적인 나와 엄마의 바느질 이야기가 제일 크고 광대한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증거한다. 나는 이제까지 우리나라 질곡의 시간을 이렇게 아름답게, 천진하게, 여성스럽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것이 응전의 방식이 되도록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없는 것 같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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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언을 한국 시단에 새로 등장한 패관 시인이라 불러도 되겠다. 그래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엔 물론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시화 詩畫’ 라는 장르명을 붙여도 되겠다. 그는 먼저 세밀하게 풍경을 관찰한 다음, 그 풍경이 간직한 비밀 이야기를 유장하게 구술한다. 마치 신세계를 다녀온 사유 깊은 패관처럼. 그래서 최치언의 시를 읽으면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설탕 맛을 보고 놀란 당나귀의 표정을 짓게 된다. 어떻게 이렇게 시가 달콤하고, 재미있고, 유창하고, 그리고 독자의 이빨을 썩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가 묘사 시에 구술 이야기라는 설탕을 발랐기 때문이다. 이 설탕을 맛보면 누구나 시가 서정의 장르로 분리 되기 이전, 말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듯한 감각의 환희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이 갑자기 신화의 시공간으로 진입한 듯한 진공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9.
여기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거나 알지 못하는 서사의 큰 줄기에서 다시 작은 줄기를, 그 가지 끝에 붙은 작은 말벌 한마리의 뒷다리를, 그 뒷다리의 셋째 마디 끝에 붙은 아무것도 없는 곳, 그 시간과 공간에 다시 서사를 기입하는 시인이 있다.아무것도 없어서 사실 제일 큰 서사. ‘아무것도 없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어서, 아무것도 없는 작디작은 곳에 기입함으로써 더 광활해지고 더 공허해지는 서사, 뱅앤올룹슨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았을 때 작은 귀마개가 아니라 기선 한척을 귀에 꽂은 것 같은 느낌이 나게 만드는 서사가 여기 있다. 임경섭의 시를 읽는 것은 하나씩의 고즈넉하고 단정한 여행을 그와 함께하는 것이다. 저쪽을 데려와서 이쪽을 새로이 구축하는 것이 시일진대, 임경섭의 시에서 저쪽은 상상력과 기억도 넘어선 ‘이방의 타자’다. 저쪽이 다가오자 나는 개명되고, 새로이 호명되어 이쪽에 무늬의 세상을 펼치게 된다. 그 무늬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의 면적은 무한히 확장된다. 시인이 부재의 섬김에 경도하자 이방의 드넓은 아름다움이 우리 앞에 도래하는 것이다. 무릇 ‘달아날수록 갇힌’ 느낌이 드는 자. “제 어미의 품에 안겨” “잠이 든 채 다른 도시로 이동”(「라이프치히 중앙역」)하는 아기처럼 떠나고 싶은 자, 이 시집을 일독하면 된다. 그러면 그는 이미 멀고 광활한 곳에 있게 된다. 더이상 제 정체성 때문에 아프지 않아도 된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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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는 여성, 남성이라는 이분법으로 갈라진 인간의 정체성을 탈피하기 위한 처절하고도 철저한 고안이면서, 동시에 한 작가의 탄생을 위한 기획이다. 여기 남자로 태어나 18년을 살다가 여자가 되어 20대를 통과한 다음 다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섹슈얼리티를 갖게 된 한 인간의 셀프가 있다. 그중에서도 사랑의 기쁨, 죽음과 같은 폭력을 경험하는 여성의 시간이 소설의 중심에 놓여 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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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비참과 비애, 번갈아 반복되는 사물과 상품의 시간을 뚫고도 시의 비의는 솟아오르는 법. 박인애의 언어는 무정형의 일상성의 장막이 살짝 찢긴 자리에서 해방의 잠재력을 발견하려는 안간힘이다. 박인애의 시에 의해 '작은 구멍들'은 가면을 벗고, 다시 불 켜진 새롭고 환한 '속의 일상'은 입술을 얻는다. 그녀의 시른 비루한 삶의 시간이 어떻게 분절되는지, 지루한 임무와 진부한 언어의 표면을 뚫고 어떻게 '환상과 진리'가 교차하는지, 그 작은 시간이 어떻게 서사 속에 서정의 열매를 맺는지를 보여준다. '슬픔의 전류가 일만 볼트' 흘러서 어떻게 '죽은 내가 밥을 해서 식구들을 살리'게 되는 지를 말이다.
12.
이런 명랑한 허무를 보았나. 이렇게 죽음의 허탈 속으로 줄달음쳐 들어가는 유쾌한 방울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 나는 없다. 나는 내가 죽는 줄도 모르고 구경에 빠져든 관객처럼 그의 시 안에서 딸랑거린다. 이런 순수한 비트와 맴도는 이미지만으로 구현한 세상의 살갗을 만져보았나. 이렇게 시만 들어갈 수 있는 6차원 존재 세계에 가본 적이 있나. 나는 없다. 나는 그가 그린 심연의 미래, 무늬의 세상에 이미 가 있다. 이런 비성년 화자의 목소리로 만든 소리의 사슬을 몸에 둘러본 적이 있나. 이렇게 리듬과 라임을 타고 와서 자기 존재와 시간을 내적 벼랑으로 떨어뜨려버린 자를 만난 적이 있나. 나는 없다. 나는 그의 시 안에서 영혼과 심장만으로 의미와 이름의 세계를 건너뛴다. 그렇지만 ‘울고 있는 꼬리의 굽은 어깨’의 정서에 젖어 왠지 울게 된다. 이런 철없는 신과 말간 눈동자를 가진 짐승이 함께 눈뜨는 순간을 목격한 적이 있나. 이렇게 흉내의 흉내로 다른 세상을 구축해가는 시인을 만난 적이 있나. 나는 없다. 나는 생활의 속옷과 기억의 모자를 벗고 빛과 소리의 명증성 속으로 들어간다. 이 시인의 직업이 전도된 세상의 ‘안내원’이기에, 그의 뛰노는 발걸음의 보폭을 그대로 따라서.
13.
유머와 아이러니로 감싸인 문장의 피부를 뒤집어보면 그의 ‘철학하기’와 ‘시하기’가 마치 옷장 안의 정전기처럼, 유희와 노동처럼 이별의 이 세상에서 서로를 맞물고 잉태한 채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며 혀로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14.
  •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2월 27일 출고 
  • 이 책의 전자책 : 5,670 보러 가기
강정은 ‘공기의 다른 형태를 부추겨 예술이라는 망집을 낳고’ 거기 들어가 ‘폐광’의 ‘광부’처럼 사는가 보다. 그는 ‘폐광의 영화관’ 속에서도 ‘빛을 도륙당한 몸 안의 탄진들로’ 누군가와 겹쳐진 존재로 존재하는데 그 누군가는 아버지나 연인, 죽은 나이기도 하지만 ‘안팎’과 ‘죽음 너머’와 ‘이곳에 없음’과 ‘지척이 광년으로 늘어나는 격조’ 등 무한일 때도 있다. 이것은 시공을 자유자재로 늘였다 뒤집었다 하는 그의 놀라운 이미지 축조술 덕분에 가능한 것인데, 이렇게 겹쳐진 존재로 있음이 강정의 시적 공간을 넘치도록 광활한 주름으로, 시원에 가 닿게, “전부 멀리로 흘러가는 영화가 되”도록 만들어 준다. 그의 시적 표현은 ‘여자로 울려고 태어난 몸처럼’ 관능적이고, 그의 시적 해석은 전율의 자성을 띤 채 시 속에서 태초의 자석처럼 진동한다. 이만큼 한국어를 자유롭고 찬란하게 부재와 버무려서 시공(時空) 없는 시공에 가 닿게 하는 시인도 드물겠다.
15.
관념이 아니라 현상의 운동성으로 존재의 심연과 높이를 끊임없이 열어 보려고 하는 끈질긴 리듬. 한 점에서 시작해서 큰 무늬가 퍼지고, 그물이 펼쳐지듯이 그 무늬들의 꿈틀거리는 육체가 하나의 음악처럼 세상을 감싼다.
16.
시집 전체를 통틀어 자신의 시 스타일을 끝까지 견지하고, 한 편 한 편에서 긴장을 놓지 않은 시.
17.
그의 비평엔 오랜만에 먼 나라에서 돌아와 고국의 시인들이 내지르는 참혹한 함성을 들은 목격자의 격정이 흘러넘친다. 이 비평가만큼 우리나라 젊은 시인들의 ‘활자들의 광란과 문장들의 궐기’를, ‘정직한 얼굴과 의연하고도 순결한 몸짓’을 속속들이, 낱낱이, 다각도로 함께해준 비평가가 있을까. 소설가들조차 단문을 쓰는 시대에 그의 비평은 한국어의 외연을 확장한 만연체다. 그의 문장은 마침표 없이 한없이 축적하고, 함축하며, 변이하고, 솟아오른다. 그는 지금 여기의 한국시가 타자를 살아내며, 타자에게로 입사하고, 이접하는 모든 과정을 함께하며 그렇게 하는 자신의 글쓰기를 비평적 이행이라고 믿는다. 이 이행의 과정 속에서 한국시사 속에서 본연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무수한 전거들(리듬, 산문시, 시와 정치 등등)이 새롭게 제시된 지평 속에서 함의를 받아 다시 돌올하게 매김되는 현상도 목격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의 비평집은 친절한 해부학이면서 동시에 시론이고, 현대시사이며 시학 사전으로 삼아도 될 정도다. 그의 비평을 읽고 나면 한국 현대시가 텍스트의 폐쇄성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 스스로가 끝없이 시 바깥을 향하는, 한없이 깊고 높은 시적 경험의 지평을 넓히고 있었음을, 개방성에 대한 의지로 목청껏 울부짖고 있었음을 목격하게 된다. 한국 현대 시인들 곁에 이렇게 세밀한 관찰자, 문장가, 비평가, 시론가, 시학자가 있어서 다행이다.
18.
그의 비평은 단정짓지 않고, 해결하지 않고, 공헌하지 않는다. 그는 한 작가가 작품의 바깥으로 내몬 얼굴의 시니피앙에 단번에 도취한다. 그는 견딜 수 없음을 견뎌내느라 주변부나 서성거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시, 소설 들에 숨은 작품 내부의 텅 빈 핵(김수영이 ‘조그만 물방울’이라 명명한 것 같은 것), 그 위태롭고 터질 듯한 불가능성에 매혹된다. 작가들이 간혹 안이라 부르고 그가 바깥이라 부르는 그 세계에. 그의 비평은 물로 옷감을 짜는 한낮의 빗줄기처럼 작품 밖을 서성거리는 작품의 맨얼굴, 작품 바깥의 광활을 더듬는 데 바쳐진다. 그러기에 그의 비평은 그림자의 텍스트, 밤의 텍스트, 소멸의 텍스트이다. 이 평론집엔 ‘아니다’와 ‘바깥’이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가 무릇 작품이라는 것이 삶 자체의 소중한 구성 성분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늘 죽음의 익명성에 드는, 죽음에 죽는, 다른 방식으로 진동하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온 길 잃은 얼굴들을 대면하는 글쓰기를 문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작품의 내용으로부터 미끄러져 단번에 작품이 탈구축한 부재와 무한한 미궁에 자신의 글쓰기의 투명성으로 스며드는 만남의 한 자세라고 말할 수 있다. 소리치고 흐느끼는 텍스트의 뼈가 이렇게 공기에 흔들리는 기체의 무늬처럼 투명한 갈망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있었다고 증언하는 것. 이 증언의 끝에서 그의 텍스트가 다시 언어 바깥의 그림자, 그 검은색 망토를 걸치고 우글거리는 대낮과 맞서는 모습! 고독하고 단정하다!
19.
  • 출판사/제작사 유통이 중단되어 구할 수 없습니다.
이응준의 시집 『애인』의 시들은 발굴된 고전의 명편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그는 닥쳐올 만남이 두려워서 먼 천둥 같은 숨죽인 비명을 지르는 소년처럼 사랑하거나, “파계한 성자들이/ 그 사과나무에 목을 매”기 직전 노래 속에 담긴 사랑을 건져서 홀로 우는 것처럼 노래한다. 유행에 비켜서서, 절박한 상실 뒤편에서 ‘시’한다. 이응준 시의 화자는 직시하지 않는다. 언제나 비스듬히, 뒤늦게 바라본다. 피하고, 겁이 난다 하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다. 그는 어제에 있었을 뿐 지금에는 없다. 반면에 “애인”은 “노래 속”에 살고, “우울과 두통” 속에 산다. 그는 애인과 공시성과 동시성 밖에 있다. 그는 ‘내’가 아니라, 애인과의 관계로부터 빠져나온 ‘어떤 사람’이다. 그는 지금 그의 현존을 구성하는 것들의 한계상황, 자아 상실에 붙들려 있다. 어째서 이 지경인가. 그의 앞에는 “마주하면 사라지게” 되는 “자기만 외로운” 시라는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우렁각시의 남자나 나무꾼과 선녀의 남자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될 “아프면 벽 틈 사이로” 보이는 “바다” 같은 비밀을 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실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발화의 불가능성 속에 연애와 시의 비밀이 있다. 그 자리에서 망설이는 틈 사이로 출렁이는 바다를 본 자가 문득 시인이 된다. 이 불가능성 속에서 그 누구의 애인이 ‘더 이상’ 아닌, 그 누구의 애인이 ‘아직은’ 아닌 자가 시인이다. 시인은 인간 존재는 결국 자신이 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의식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부재를 끌어안은 이응준식 ‘연애’의 발화, 시가 다시 시작된다.
20.
김행숙의 시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 진화는 동일성을 벗어 나가는 시적 화자의 끝없는 탈피, 타자의 머리와 발바닥과 내장과 핏줄을 동시에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새로운 애무 방식의 고안, 시의 시간의 바로크적 응집과 투명한 확장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다. 시는 누가 보아도 그러한 자리, 어떤 사건에서 피어오른 하나의 이행이다. 그 이행이 환기하는 하나의 세계다. 김행숙의 시는 일상적 일점, 사건의 추락 지점에서 촉발해 시간의 주름을 펼치거나 접음으로써 우리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전체의 풍경 안에 있게 한다. 이것이 김행숙 시가 내포한 윤리적 차원일 것이다. 이를테면 호흡을 하거나 서랍을 열거나 화분을 손에 올리는 그 하찮은 순간에 ‘지구의 골목길 전체’와 저 ‘파도 너머’, ‘호흡기관 너머’의 어떤 호흡까지 아우르는 어떤 총체성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는 순간의 착란, 투명한 분절이 그녀의 시의 이행이다. 그러기에 김행숙의 시들은 시간의 순간적 현현과 그 사라짐을 기리는 하나의 제단, 제사의 형식 안에 있다. 제사를 통해 이별의 파열을 춤추게 하고, 메아리치게 하고, 세 겹 네 겹 주름을 펼치게 하자 시들의 매 순간, 혹은 어떤 형상과 사건들이 늪으로 섞여 든다. 이 우주가 자아를 잃어버리는 동일자들의 작별의 소용돌이에 거한다. 그 후 안개 속에서 거대한 여성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한이 분출하여 세계를 뒤덮는다. 무릇 시인은 시적 화자의 진화를 통해 부재의 번성을 꾀하는 법. 김행숙의 시에는 단수/복수, 안/밖, 전/후, 성스러운 것과 상스러운 것들의 구별이 없을뿐더러 선악의 기준도, 현실/비현실의 경계도 없다. 그것은 시적 화자가 사춘기, 귀신 화자이면서 동시에 흔적 화자, 메아리 화자, 꿈 화자, 반면(反面) 화자, 잠으로 현실을 구축하는 화자, 출몰과 매몰이 자유로운 화자, 감각의 테두리를 버린 화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화자가 ‘물에 빠진 사람’처럼 총체적이 된 우리를,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 ‘나’를 순간의 무한 황홀 속에 이륙시킨다.
21.
고객의 매장된 불안 갱도를 파 내려가야만 하는 경력직 영업 광부를 엄마로 둔 아들은 자라서 무엇이 되었는가. 그는 필멸을 목전에 두고 불안에 떠는 인류의 불안 갱도를 파 내려가는 셰에라자드, 혹은 지구 종말 이야기가 데워 놓은 ‘물에 잠겨 부레처럼 지갑을 벌’리는 사람들을 발굴하는 마지막 ‘이야기 광부’가 되었다. 한 꺼풀 현상의 세계 아래엔 ‘누구의 코털에도 걸러지지 않는 유독가스처럼 질긴 이야기’들이 매장되어 있다. 그는 풍경의 장막 뒤에 숨어서 필멸을 향해 작동하는 서사의 폭주를 따라가면서 우리의 발밑에서 생육하는 비밀스런 이반(異般)의 세계와 접선하여 음란과 광기와 결손과 분노의 절면을 떠낸 보고서들을 작성한다. 그는 그가 시간의 주름 속을 기어 다니며 발굴한 이야기들이 일종의 안내서, 분노 조절 지침서, 행동 지침서가 되기를 바란다지만 ‘마지막 이야기’가 ‘눈을 뜨고’ 있는 그의 시들은 우리를 ‘더워서 눈물 나고 슬퍼서 땀이 나는’, ‘슬플 틈도 없이 뜨거운’ 세계로 데려가고야 만다.
22.
장석주의 이번 시집은 시를 읽는 우리를 글자 밖에 있게 한다. 시의 행들이 다 난간이고 난간 아래 저 멀리 정적 속에 시가 있다. 그의 혀는 입속에 있지 않고, 그가 아닌 것들 속에 있다. 빗방울 속에 있고, 바람 속에 있고, 적막 속에 있고, 우주 속에 있다. 아무래도 장석주는 이 시들을 쓰면서 “제 몸 벌겋게 태워 부르는 노래, 필경 청음(淸音)을 얻었”나 보다. 그는 우리를 앞서간 시인들이 꾸렸던 우리말의 드높고 적막한 경지, 그 필멸의 포에지를 얻었다. 그는 리듬을 남겨,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얻고, 생의 비루한 장엄을 얻었다. 그러나 감정과 관념과 의미는 내쳤다. 심지어 내용도 내쳤다. 그러자 우리 눈앞에 단지 몇 개의 선으로 그어 놓은 상처의 깊이로 가라앉는 투명한 “길 없는 백색 제국”, “공중에 박새 한 마리 설산 등지고 날아가”는 스스로 애절한 절경 몇 점!
23.
기스바! 네 할머니 톤으로 너 불러보자. 노래의 날개를 달고 이 세상에 와서는 이승을 저승처럼 살다가 노래의 나라로, 그 아득한 곳으로 가버렸구나. 네 시와 삶 속에 가득 들어찼던 죽음 버리고, 네가 그리 시 속에서 찾아 헤맸던 죽음 속에 깃든 삶의 나라로 날아가버렸구나. 거기선 기저귀 차고 목침 들어 할머니 얼굴 짓이기던 할아버지,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아버지, 모두 잊어버려라. 네가 이 세상에 혼자 남는 것 안타까워 너 불러가신, '엄마라고 부르면 늘 할머니 되던' 할머니, '비명 같은 엄마' 계시는 그곳에서 재미나게 살거라. 그곳에선 라이터로 변소 줄 태워 할머니께 혼나지 말고, 너 행생 나갔다 늦게 돌아와 할머니 기다리게도 말고, 네가 그리워하는 연인 속에서 글썽한 그 큰 눈으로 웃고 살거라. 노래의 나라에서 그렇게 살거라, 기스바!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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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를 예감하는 것이 그의 시적 궤적이며, 그의 예민한 시적 촉수가 붙들고 있는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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