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계의 성지 순례"
하드보일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 필립 말로를 창조한 레이먼드 챈들러의 단편집. 그가 남긴 스물 다섯 편의 단편소설 가운데 아홉 편을 추려 실은 책이다. 이 중 여러 편에서 반가운 얼굴 필립 말로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작품집 속에 등장하는 필립 말로는 원래는 필립 말로가 아니었다. 각각의 단편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필립 말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 단편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다른 인물들이 등장했다. 나중에(필립 말로를 탄생시킨 뒤에) 레이먼드 챈들러가 이 작품집을 단행본으로 만들면서 이 서로 다른 인물들을 모두 필립 말로로 통일시켰다.
여러 주인공들을 한 명으로 포괄하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읽어 보면 별다른 위화감을 느낄 수 없다. 나중에 필립 말로에게 이름을 양보한 이 주인공들은 이미 필립 말로와 무척 닮아 있었던 것이다. 이를 시간순으로 정리하면,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속에 등장한 서로 다른 인물들이 점점 겹쳐지면서 어느 날 명탐정 필립 말로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 단편집은 하드보일드 소설 팬들에게는 각별한 책이 될 것이다. 필립 말로의 전설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또한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성지 순례의 길이 열렸으니 모두들 오셔서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마음에 담아가시기 바란다.
- 소설 MD 최원호 (2016.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