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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고명재의 첫 시집. 내 안에 고인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시인은 그 사랑의 환한 노란 빛을 옮겨적어 시를 짓는다. 자신을 기른 비구니들의 사랑, 밥을 지어 팔아 생계를 꾸린 가족의 사랑. 사랑에선 제철음식 맛이 난다. 잘 말린 대추의 반들거림, 거의 다 탄 쑥의 냄새, 좋은 튀김에서 나는 여름옷 같은 소리, 페이스트리가 부풀기를 기다리는 시간... 2장에 배치된 시 <소보로>는 삶이 시가 되는 시간, 그 순간의 시 되기를 이렇게 적는다.
그때 나는 빵을 물면 밀밭을 보았고
그때 나는 소금을 핥고 동해로 퍼졌고
그때 나는 시를 읽고 미간이 뚫렸다
그때부터 존재할 수 있었다
시로 존재하기를 선택한 시인의 첫 시집을 읽으며 빵에서 밀밭으로, 소금에서 동해로 퍼져나가는 이 감각을 따라 나의 가장 투명한 부위가 부푸는 시간을 같이 겪었다. '아이스크림처럼 부모는 늙어버렸다'는 비유(<일흔> 중)로 누워서 막대 아이스크림을 핥는 내 아버지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떠올렸고, '엄마가 잘 때 할머니가 비쳐서 좋다 떠난 사람이 캄캄하게 보고 싶어서'라는 (<엄마가 잘 때 할머니가 비쳐서 좋다> 중) 문장을 통해 돌아가신 할머니의 60대와 꼭 닮은, 60대인 엄마의 자는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이 많은 것을 겪고도 아직 우리에게 구체적인 맛의 감각이 남아있다는 것, 여전히 생을 사랑하는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 본다. 이 시집의 마지막 시 <자유형>의 아름다운 한 문장으로 새해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